한국일보

나이를 먹는다는 것

2012-07-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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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8년 전의 일인 것 같다. 한국에서 이곳 지사로 파견 나와 일하던 고등학교 동기 친구 로부터 공항에서 겪은 일을 전해 들었다.

키가 상당히 크고 군살이라곤 한 군데도 없던 이 친구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머리숱이 조금 적은 편이었다. 직장 때문에 버지니아의 덜레스 공항 이용이 잦았다. 그런데 한 번은 한국에 다녀오면서 입국수속을 하려고 평소와 같이 외국인 입국 심사대로 갈 때였다.

덜레스 공항에는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 도착시간에 맞추어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말로 안내하는 직원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직원이 내 친구가 오는 것을 보더니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하더라는 것이다. 누구한테 얘기하는 것인지 몰라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바로 뒤에는 없었다. 그런 찰나 자기를 가리키면서 한 얘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적잖이 당황스러워졌다.


그리고 “아니 이럴 수가, 아직 40대인데 아버님이라니,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던 주위의 친구들 모두 배꼽이 빠지라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에게도 얼마 전에 처음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 마켓에서 필요한 음식들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는데 중년의 여성이 계산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자 “아버님, 카트에 있는 그 물건 좀 이리 올려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나를 두고 한 얘기인데 그럴 수가. 이제 50대 중반인데 아버님이라니.

물건들을 모두 차에 옮겨 싣고 운전석에 앉자마자 앞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에 머리가 약간 더 빠져 이마가 넓어진 듯 했다. 얼굴에 기미도 늘었다. 그러나 그래도 ‘아버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님 소리를 들으려면 적어도 70세는 되어야 할 텐데, 아버님이라니 결코 유쾌한 호칭은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에 조급함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지도 이제 내후년이면 40년이다. 참 긴 세월이었다고 생각될 수 있는 40년이 되돌아보면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50대 중반의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그 만큼이 안 되는 것은 확실하다. 아니 어쩌면 그 절반 정도 밖에 남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더 정확할런 지 모른다. 그러니 아직도 하고 싶거나 꼭 해야 될 것 같은 일들을 생각할 때 이제는 시간이 더 이상 내 편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맨 처음 교육위원에 당선되어 교육위원 활동을 시작했던 1995년에는 버지니아, 훼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중 최연소 위원이었기에 가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이 많은 동료 교육위원들에게 농담 삼아 나이 얘기를 하곤 했다. 교육청 직원이나 학교 교장들도 대개가 나보다 나이가 위였다.

그러나 이젠 동료 교육위원 중에서도 어린 측에 속하지 않아 당연히 그런 농담이 통하질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나이가 아래인 교육위원이 나이 얘기를 할 때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느낌이 찾아 들기도 한다. 아직 교육위원으로서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순리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위해 더 이상 언제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평소와 달리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는 적어도 70이나 75세까지는 은퇴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나이에 은퇴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기간이 나에게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절대로 그렇게 일찍 은퇴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한다.


어쩌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 모두를 내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오는 조바심인지도 모른다. 허나 예전에 비해 마음이 다급해짐을 느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는 일처리에 실수가 있을 수 있으니 차분함을 되찾자고 다짐해 보면서도 몇 년만 지나면 정말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활발하게 일하던 시기를 정리해 가야하는 시점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는 나를 발견한다.

혹자는 이것 또한 나이가 들면 잠이 적어지기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지적해 줄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게 할 줄 몰랐다.


<문일룡/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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