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가뭄이 심하다고 한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진 사진을 보면서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썩굴 둠벙과 잠사골 샘이 함께 떠오른다.
썩굴은 고향의 골짜기 이름인데 그 곳에 우리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산골짝 논이 그렇듯이 하늘만 쳐다보는 천수답이었다. 맨 위쪽에 논배미들을 먹여 살리는 제법 큰 둠벙이 있었다.
가뭄이 극심했던 어느 해, 못자리 할 때부터 둠벙물을 퍼 쓰기 시작했다. 모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물만으로도 하루 한 뼘 이상씩 물이 줄어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맞두레질로 물을 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새끼줄 두 개를 양손으로 잡아 균형을 맞춰 물을 퍼 올리는 작업이었다. 두레에 담기는 물의 양은 대략 양동이 하나에 담기는 정도. 퍼 올리는 높이가 높을수록 힘이 들기 마련이었다.
물이 줄어들자 결국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은 곳까지 두레를 내려 물을 담은 다음,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팽팽하게 균형을 이뤄 젖 먹던 힘을 다해 한 두레 물을 퍼 올렸다. 두레를 따라 둠벙으로 끌려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뎌내야만 했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둠벙 물이 바닥을 보이자 모가 타들어갔다. 내 가슴도 그렇게 쩍쩍 갈라지고 타들었다. 하는 수 없이 호미모를 심었다. 물 한 바가지에 모 한 포기를 심는 작업이었다. 그러기를 며칠 했지만 이번에는 심어놓은 모가 말라 비틀어져갔다. 결국 논을 갈아엎고 메밀 씨를 뿌려야만 했다. 자연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게 농부들의 삶이었다.
신문은 몇 십 년만의 한해라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 혹독한 가뭄에도 잠사골에 있는 논은 끄떡없었다. 자그마한 샘 때문이었다. 썩굴 둠벙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들 샘이었지만, 퍼내고 퍼내도 금시 물이 고였다. 겨울이면 멀리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웃 논에서 물이 필요하다면 퍼다 쓰도록 했다.
그 해 잠사골 논은 평년작 이상의 수확을 했다. 잠사골 논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 먹을 식량마저 마련하지 못할 뻔 했다. 가뭄이 들어서야 잠사골 샘의 진가를 깨닫게 되었다.
물이 없으면 논이란 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가뭄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다. 헤쳐 가야할 내 삶의 논바닥에 물처럼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게 무엇인지 딱 잡히진 않았지만, 책 속에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사볼만한 처지는 못 되고, 이웃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시골동네라 읽을 만한 책이 금방 동이 났다. 이웃 마을은 물론 읍내 아는 집에서도 책을 빌려왔다. 전기불도 없던 시절, 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던 시절이 눈에 선하다.
4년 동안 농사를 지었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늦었지만 스물한 살 나이에 고등학교를 가기로 결심했다. 광주에 있는 야간 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렇게 새 길을 걷게 되었다.
저수지가 쩍쩍 갈라진다는 뉴스를 보면서 내 가슴도 탄다. 물이 없어 모를 심지 못하고 메밀 씨를 뿌렸던 때가 다시 생각난다. 그리고 잠사골 샘이 떠오른다.
나는 누구에게 잠사골 샘 같은 사람이 되고 있는가. 내 삶을 되돌아본다. 내 삶의 논바닥을 촉촉이 적셔줄 마르지 않은 작은 샘, 잠사골 샘 같은 친구가 그립기도 하다.
정찬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