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매일 조금씩 떠나보내는

2012-06-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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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사철 먹을 게 마땅치 않을 때 부담 없이 떠오르는 단골 메뉴는 무엇일까? 바로 된장찌개가 아닐까 싶다. 우리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된장찌개는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야 제격이고 풋고추랑 애호박, 두부를 곁들이면 달랑 찌개 하나만 먹어도 속이 든든해진다.

변하는 음식문화에 편승하여 사람의 입맛도 변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입맛은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향수병 같아 진한 사랑을 깔고 있다. 한국 사람이면 콩을 원료로 만든 조상대물림의 된장찌개를 늘 대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국민체조 같은 웰빙 음식이고 보니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상추쌈을 위시해 열무 철에는 된장찌개 열무김치 보리밥은 인기 절정의 건강 음식임을 아무도 부정 못할 것이다. 가진 것 없던 때도 우리는 이 음식에 기대어 어려운 시절을 견뎌올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고향처럼 자리 잡은 된장찌개, 바로 고향의 맛이다. 가족의 맛이다. 집집마다 가문의 얼이 담겨져 있는 장독대는 된장공동체란 역사의식도 담고 있다. 비위생적이라 보는 견해도 있지만 침 묻은 숟가락 담그며 함께 떠먹는 된장찌개는 둘러앉은 모두가 한 가족임을 천명한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 지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된장찌개에 보글대고 있다. 슬기로운 조상을 만나는 맛이다. 한국 어머니들은 정이란 양념을 넣을 줄도 알았다. 눈물 섞어 끓인 된장찌개를 즐겨 먹어온 한국 사람들은 튼튼했고 유독 정이 많다.

그런데 이민 온 우리의 입맛은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된장찌개는 점차 사라지고 개량된 우리 입맛에 맞는 찌개들이 상에 오르고 있다. 음식 역시 개량과 변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건강에도 이롭지 않은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음식을 후세들에게 먹이면서 우리는 고향을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다.

그러나 된장찌개를 떠나보낸다고 해서 이 음식이 주는 위로와 지혜까지 버릴 수는 없다. 오랜 세월을 거쳐 숙성한 된장으로 끓이는 이 음식은 은근과 끈기를 상징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민 정신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접한 기아선상의 북한 어린이들 영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피골이 상접한 그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된장찌개라도 실컷 먹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고향의 맛에서 시작된 상념이 북한의 기아어린이들로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된장찌개가 통일찌개가 되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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