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신대 이야기

2012-06-1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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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지 시대이던 세계 2차 대전 말엽 때 일이다.
한 사람 앞에 하루 식량 배급이 쌀 일홉 오작(눈까리 홉 하나에 다섯 숫가락) 이었다. 매일 배가 고프고 그나마 썩은 콩 깻묵을(일본 군마들이 먹는 식량이라 했음) 식량 배급으로 주니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굶었으면 굶었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극도로 배가 고프던 그 때 소문이 돌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일본 군인들이 미군과 싸우고 있는 남양 어떤 전쟁터에 군속으로 가면 여유 있는 식량 배급 뿐아니라 일본정부로부터 뒤에 남은 그 식구들 전체의 생활을 보장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굶주린 우리들에게 특히 식량 배급을 많이 준다는데 큰 관심이 쏠렸다. 예외 없이 우리 집도 온 식구가 허기진 상태였다. 정신대는 처음에는 자원하는 형식으로 시작했으나 곧 징집 상태로 이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결혼한 사람이나 의학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신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내 친구 한명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버렸다. 그 아버지가 자기 딸을 정신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국민학교 졸업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졸업하자마자 결혼 시켜버린 것이었다. 그 때 내 친구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시시각각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들려오는데 아직 어린 우리들의 앞길이 전혀 가늠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끝없는 어두운 흑암 속길 같았다.
마침 의학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은 정신대에 안 가도 된다는 소문에 나는 그 길로 향하여 가기로 작정하고 잠시도 한눈 팔지않고 일사불란 간호원 그 한길만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렇지 않으면 허울 좋은 일본 군인들의 군속으로 남양 어떤 섬에 정신대로 끌려 갈 판국이었다. 또 다른 수군거림 중에는 정신대 끌려가던 아가씨들이 탄 일본군함이 미국 B29 폭격기 폭탄에 맞아 태평양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 뉴스를 듣자 마치 우리가 폭탄 맞은 것 같이 공포에 떨었다.
내 선배의 친구 한명은 집이 너무 가난해 부모님들에게 한 번 효도해보자고 정신대에 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소식을 듣자 내 마음 무너지는 것 같이 슬펐다. 정신대에 가서 무슨 일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무섭고 불안했다.
나는 국립간호학교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2년은 학술공부, 2년 실습이 끝나면 RN(Registered Nurse) 면허증 가진 간호사가 된다. 산파공부 하려면 또 다시 국가고시를 쳐야하는 데 만약 산파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들이 병원을 개업하는 것 같이 출산을 도우는 산원을 개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소원이던 산파 시험에 합격하여 산파가 되었다.
정신대에 끌려 간 내 친구들은 일본이 군속으로 좋은 대접 해준다고 속여서 간 것이지 지금 그들이 억지로 주장하는 창녀들이 결코 아니다.


하순득
워싱턴 수필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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