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2012-06-08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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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어둠이 깔린 뒤에도 비는 거리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 빗길을 달려 온 사람들이 젖은 옷을 털며 장례식장에 들어선다. 틈틈이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사는 한국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일 때마다 어김없이 한민족의 정(情)을 나눈다. 머나 먼 이국땅에 몸담고 살고 있지만 가슴 속에 담긴 한국인만의 인정(人情)이 어디 가랴.
죽은 자가 누구이건 간에 인정 하나로 달려 온 사람들, 고향 시골 상갓집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먹고 살기 위함이요, 돈을 벌기 위해 우범지대임을 무릅쓰고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다 강도의 총탄에 쓰러진 동포 청년의 시신이 놓여 있다. 마지막 고별하는 장막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한탄과 흐느낌이고 찾아 온 사람들은 저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거나 가벼운 묵례로 미망인을 위로했다.
고별예배는 시작되고 졸지에 지아비를 잃어버린 젊은 미망인의 탄식이 장내를 슬프게 한다. 어린 아들은 사람들 사이로 오가며 철없이 뛰어놀며 가끔 아비의 시신(屍身)앞에 다가가 아빠를 부르지만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무거운 침묵이 동포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을 때 평소 고인의 가게에서 일하던 젊은 흑인 남녀가 장내에 들어섰다.
얼마나 정이 들었으면 피부색이 다른 사자(死者) 앞에서 저렇게도 슬피 우는 걸까. 싸늘한 얼굴을 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보내는 두 사람의 흐느낌 때문인지 사람들의 눈물은 가실 줄 모르고 그들의 흐느낌 때문인지 장내는 더욱 고요했고 사람들은 더욱 슬픔에 잠겼다.
그렇다. 이웃 아픔 내가 알면 나의 아픔 이웃이 안다 했는데 젊은 가장(家長)의 죽음 앞에 인생무상(人生無常)만이 스치고 있는 순간 밖에는 빗물이 주룩주룩 내린다. 워싱턴 밤하늘에 차가운 밤비가 그칠 줄 모르는 가운데 이민자들의 가슴 속에는 슬픔이 가실 줄 몰랐다.


김해남
랜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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