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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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 ? 희망

2012-06-0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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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희(뉴커머스 고교 교사)

다음 주면 에반이는 다섯 살이 된다. 에반이가 두 돌을 넘길 때 놀이방을 보냈을 때 일주일이면 눈물바람 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지낼 것이라던 놀이방 원장님의 말을 가뿐히 무너뜨리고 주변 환경의 변화를 빠르게 읽지 못해 꼬박 넉 달을 아침마다 울었던 모습이 눈앞을 지나친다. 그 와중에 에반이의 자폐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러워하던 나였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중증자폐라는 단어는 에반이를 설명하는 자연스러운 형용사가 됐다. 지금 나는 그 때의 혼란함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내 키의 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는 에반이를 보며 엄마의 희망을 쑥쑥 키워나가고 있다.

나의 희망은 에반이가 이 사회 속에서 내가 없이도 행복한 자폐인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이 희망 철학은 에반이의 교육이나 치료법을 선택할 때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아이의 자폐를 막 알게 돼 혼란스러운 부모들에게 나누고 싶은 메시지이도 하다.

장애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아이에게 어떠한 희망을 갖는지에 따라 부모의 교육관은 다르게 형성이 되고 그로 인한 교육관은 자신의 아이의 미래를 꾸려나가는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왔을 때 부모와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느낀다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스스로의 진로를 추진할 수 있는 일반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힘든 발달장애아들에게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부모의 눈이 더욱 필요하며 그에 따르는 ‘올바른’ 희망을 갖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아이의 자폐 사실을 최근 알았을 부모들에게는 가장 쓴 소리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헛된 희망을 꼬집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좋다는 모든 치료를 다 받으면 정상아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폐에 대한 치료법을 총망라해 소개하고 있는 Ken Siri와 Tony Lyons가 펴낸 Cutting-Edge Therapies for Autism(2010~2011) 판을 보면 그 치료법이 무려 69가지나 된다.

나는 그 책을 읽을 때 어떠한 치료가 효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왜 이렇게도 치료법이 많이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느끼게 된 것은 이렇게까지 치료법이 난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아이를 ‘완치’해놓고야 말겠다는 부모들의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은데 지푸라기라도 훌떡 잡아보고자 하는 ‘잘못된’ 희망이 여전히 절대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이러한 ‘잘못된’ 희망을 에반이에게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먼저 착실하게 69가지나 되는 치료법을 다 해 보아야 하겠기에 수중의 돈을 깡그리 썼을 것이고 그렇게 좋다는 치료법을 다 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살이 되도록 눈맞춤도 여전히 좋지 않고 한 문장으로밖에 대화를 못하는 ‘완치’가 되지 않는 모습에 너무나 절망을 했을 것이다. 그 절망에 이를 때쯤이면 나의 마음은 너무나 황폐해 에반이의 조그마한 성장에도 웃음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쳤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희망이 있기에 믿는다. 에반이는 행복할 것이다. 에반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에 행복할 것이다. 에반이는 자신의 장애를 그대로 봐주는 사회에 섞일 수 있기에 행복할 것이다. 에반이는 더 이상 엄마가 지켜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준비시켜 나갈 것이기에 행복할 것이다. 에반이는 그러한 변화를 통해 장애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 그러한 ‘다름’이 있기에 이 세상이 풍요하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 가르쳐줄 것이기에 행복할 것이다. 에반이는 ‘완치’가 되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폐가 있기에 행복할 것이다.

이만하면 에반이에 대한 나의 ‘희망’은 여느 부모에 견줄 바 없이 거창한 것이라고 자랑할 만하다. 하지만 나의 ‘희망’은 현실적이며 정직하고 그렇기에 무한하다. 나는 에반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에반이에게 가장 필요한 희망을 갖고 있다. 세상이 알아주는 자폐, 그 세상에서 섞이는 자폐성 장애인이 그것이다. 에반이가 잠든 사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내가 글을 써나가는 것도 자폐가 생소한 일반인에게 자폐를 알려줘 에반이를 세상에 섞이게끔 할 수 있도록 하는 나의 에반에 대한 ‘희망’ 덕분이다.

녀석이 나중에 커서 내 손에서 벗어나 혼자가 될 때 지금 내 글을 읽는 그 누군가가 에반이와 만나게 되어 그를 그대로 이해해주는 벗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한 모습을 그려보는 나는 즐겁다. 그래서 나는 내 ‘희망’이 고맙고 그러한 ‘희망’을 갖게 해 준 우리 아들이 마구 고마워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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