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훼어팩스 카운티의 청소 및 시설관리 자문위원회(Custodial Services Advisory Council)라는 기관의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관은 내가 교육위원으로 있는 버지니아주 훼어팩스 카운티 교육청 소속의 청소 및 시설관리 담당자들과 관련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교육청에 건의도 하는 자문기구다.
그 날 이 모임에는 약 40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두 분 정도 계셨다. 그 분들이 반갑게 웃음으로 대해 주시는 것에 마음이 편해졌다. 평소 이런 자문기구 모임에 한국분들이 계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이 두 분이 계시는 것이 고마웠다.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국 남자 한 분이 같이 나오셨다. 간단히 서로 인사를 한 후 이 분으로부터 작은 메모지 한 장을 전해 받았다. 그런데 그것을 읽는 순간 가슴이 찡했다. 전해주신 메모는 그 날 회의시간에 앉아서 작성하신 게 분명한데 영어작문이 거의 완벽한 문법과 문장구조에 논리 정연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 메모에 이민자로 살아가는 많은 분들의 애환이 담겨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듯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계셨다면 학교 청소일을 하실 분이 아닌데 이민자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 때문에 청소일을 하시는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들이 훼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 내에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지난 주로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1년이 되었다. 미국에 처음 오셔서 어머니가 오랫동안 하시던 일이 청소였다. 그 시절 많은 어머니들이 그렇듯 어머니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불행하게도 제대로 교육을 받으실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 청소 외에는 다른 일을 하실 능력이 없으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청소일을 참 열심히 하셨다.
당시 우리 가족은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시에 살았는데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시고 모든 식구들의 점심 도시락을 챙기시며 저녁 준비까지 마치신 후 크리스탈 시티에 있는 호텔에 청소일을 하러 나가셨다. 그 당시 집에 차가 한 대 밖에 없었고 그 차를 아버지께서 워싱턴 디시에 있는 직장에 출근키 위해 쓰셔야 했기에 어머니는 버스를 이용하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덟 시간 동안 호텔 방과 화장실을 청소하신 후 버스를 타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태운 버스는 우리가 살던 집 옆을 지나 랜드마크 샤핑센터에서 어머니를 내려놓는다. 그 곳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신 후 어머니는 애난데일에 위치한 노바대학교 캠퍼스 건너편에서 내리신다. 거기서 다시 약 3분의1 마일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면 언덕 맨 위 오른쪽에 조그마한 사립학교가 하나 있었다. 지금 유태인 커뮤니티센터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 곳에서 또 청소를 하셨다.
작은 학교였지만 학교 전체 청소를 혼자서 맡아 하셨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벽서부터 일어나 이미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오셨기에 많이 피곤하셨을 것이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우리 가족들은 가끔 모두 그 학교로 달려가 같이 청소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에게는 절대로 화장실 청소를 시키지 않으셨다. 물론 나의 청소 실력이 믿을 만 하지도 않았겠지만 아마도 아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게 싫으셨던 것 같다. 청소일은 당신 세대로 족하다고 늘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청소일은 이렇게 호텔이나 학교로 끝나지 않으셨다. 남들 모두 쉬는 주말에도 가정집 청소를 하셨다. 열심히 일해 한 푼이라도 더 생활비에도 보태고 세 자식의 대학 학비도 모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가정일 청소를 그만두신 것은 화학약품을 한 번 잘못 사용해 청소하시던 어떤 가정집 카펫을 손상시킨 후였다. 그 당시 손상된 카펫 값을 변상하려면 아주 많은 돈이 들텐데 하고 노심초사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시절 내 기억에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어머니날을 맞아, 우리의 어머니를 다시 생각하고, 부모 된 우리 스스로도 제대로 된 부모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먼저 가신 어머니가 많이 그리워지는 5월이다.
문일룡/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