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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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 (16) 자폐가 맺어준 우정

2012-05-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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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희(뉴커머스 고교 교사)

나에게는 에반이의 자폐가 맺어준 소중한 친구가 하나 있다. 한국에서 그를 만났더라면 언니라고 해야겠지만 영어권에서 만난 그이기에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다 보니 언니 동생의 사이보다는 조금은 거리감이 있을 수 있는 돈독한 친구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에반이에게 자폐가 있다는 것을 막 알았을 때쯤 그를 만나게 됐다. 그 당시 에반이는 두돌이 넘도록 말을 하지 않고 눈 맞춤도 거의 없는데다가 흥미가 있는 무엇을 보고도 전혀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 전형적인 자폐의 특징이 너무나 명확히 보였기에 내 아이의 자폐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에반이의 장애를 인정하고 나니 도무지 어떤 식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무슨 교육이 적절한 것인지 가늠이 잡히지 않아 그것이 고
통스러웠다.


자폐가 생소한 많은 주변 분들은 아이가 두돌 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한결같은 반응이었기에 그들을 잡고 자폐가 있는 에반이를 위해 뭘 해야 하겠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에반이 또래인 이웃집 아이도 신기할 만큼 에반이와 비슷하게 눈 맞춤이 되지 않는 것이 ‘저 아이도 자폐가 있나보다’ 하는 반갑기도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럼없이 그 아이 엄마에게 에반이의 자폐 사실을 밝히며 다가갔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 엄마는 “참 안됐네요” 하는 말만 할 뿐 자신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아이는 말이 좀 늦는 것
뿐이라며 더 이상 자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게끔 쐐기를 박았다.

같은 발달장애아를 가진 엄마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열고 선뜻 다가갔었는데 아이의 장애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이웃집 엄마의 모습에 더욱더 갈 길을 잃은 듯 막막했다. 최근에 보았던 그 이웃집 아이는 엄마가 말했던 말이 좀 늦은 아이가 아닌 자폐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소년으로 훌쩍 자라있었다.도무지 누구와 이야기를 해야할 지 난감했던 그 때. 어떤 학교를 보내야할지도 몰랐고 사막의 모래알처럼 수도 없이 난무한 자폐 치료법들에 머리가 며칠간 지끈거릴 정도였다. 두 돌이 막 지난 에반이의 자폐에 대한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딱히 없었기에 그 당시에는 에반이와 단 둘이 속수무책으로 무인도에 살고 있는 듯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그는 무인도에 떨어져 혼자 살고만 있던 나에게 홀연히 통통배를 타고 와 무인도 있던 나와 에반이를 탈출하게끔 해 준 사람이었다. 그 역시 자폐아를 키우고 있는 엄마였지만 그는 이웃집 아이 엄마와는 달랐다. 그도 물론 아이가 자폐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 앓이를 단단히 했지만 그는 아이의 장애를 털어놓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처음 그와 통화를 했을 때 절벽을 친 듯한 답답한 나의 마음도 훤하게 뚫리는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전화로 처음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선뜻 만나자고 하니 그는 두말없이 나와 주었고 그 만남을 계기로 우리는 꽤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사실 이야기라고 하지만 상당 기간은 장애아의 엄마 신고식을 막 했던 시기였기에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 그에게 물어보면 그는 조언을 해주며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였다. 이제는 장애아의 엄마로 몇 해를 살아오다 보니 장애아 엄마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는지 에반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아주며 그에 맞는 가능성을 살려주는데 조급하지 않게 다가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신고식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마음만 졸이고 눈물을 찔끔 흘리는 그런 엄마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가 고맙다.

아이가 어릴수록 자폐사실을 인정하고 올바른 치료법을 받는 엄마가 사실 많지 않다. 어리기 때문에 자폐와 같은 발달장애는 제대로 드러나 보이지 않고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며 생각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이의 장애사실을 일찍 인정하고 치료를 일찍 시작한 엄마들이라 하더라도 아이가 어리다면 아이의 자폐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열심히 치료를 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시에 받는 올바른 치료를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발해 나가는 자폐성 장애인들이지만 대부분 그들의 자폐성향은 일생에 걸쳐 남아있기에 ‘완치’라는 개념은 맞지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장애아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남들보다 몇 배가 힘들고 긴 여정을 갈 준비를 예의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와 나는 이러한 긴 여정을 가게 될 친구가 됐다. 그와 나는 급할 때 서로의 아이를 부담 없이 봐달라고 맡기고 가끔씩 만나 저녁에 술 한 잔도 기울이며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는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아이비리그 학부와 법대 코스를 밟은 수재이지만 대화중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보지 못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남에게 내세우는 조건만을 늘어놓는 빈 껍질 같은 겉도는 내용이 아니라 자폐라는 장애가 우리에게 준 고통을 힘들지만 행복하게 이겨
나가고자 하는 진지함이 배어져 있는 진솔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앞으로의 긴 여정에 서로 지치지 않게 격려해주는 우정을 그려보며 지긋이 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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