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우 칼럼 - 천광청 변호사의 고난
2012-05-06 (일)
1971년 7월인가 필자는 당시 하와이대학 신문학 조교수 시절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씨가 비밀리에 평양엘 가서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돌아왔다. YMCA에서 Y논단이라고 남북회담 이후의 문화, 언론, 학계의 진로인가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을 때 소설가 박종화 씨,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씨, 그리고 필자가 패널리스트였다.
사족을 달자면 그 두 분과는 동열에 설 수 없는 일개 조교수가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의 제퍼슨 장학금을 받고자 원하던 어떤 신문사의 문화부장이 나의 추천을 받기 위해 그렇게 마련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언론의 기능 중 독립된 진실 규명 및 사태 분석 등이 중요하다는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되는 바 회의가 끝나고 젊은 대학생이 다가와 질문을 하던 중 주소를 물어서 학교 주소를 대주고 연락처로는 처갓집 전화번호를 주었었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처갓집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대학생이 나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했었는데 답장이 없어 이상하다고 전화가 왔었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아마도 반독재 성향이 있는 그 학생이 나에게 보냈다는 편지들이 모두 중앙정보부의 검열에 걸려 나에게는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당시 한국 상황이 그러했다.
그 생각이 연상된 것은 지난 금요일 천광청이란 중국의 맹인 변호사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가택 연금을 당하다가 밤중에 담장을 넘어 탈출하여 기다리던 동지의 차로 400 마일을 달려 북경의 미국대사관으로 피신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천 씨는 날 적부터 맹인인데 그런 장애를 극복하고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에 붙었다니까 여간 출중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40세로 노모를 모시고 살면서 열 살짜리 아들 하나를 둔 네 가족 성원의 가장인 바 중국 정부 즉 공산당의 1자녀 강제 정책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불임 수술을 강제로 당한 것에 대해 집단 소송을 제기하여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국제인권단체들이나 외국정부들의 항의가 있을 것을 염려해서인지 그가 법정에 서게 된 죄목은 (아마도 데모를 하려 몰려든 고객들의 앞장을 섰었던 때문인지) 도시의 교통방해였단다.
51개월 징역형을 살고 나온 천 변호사를 기다리는 것은 산동성 린이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연금 상태였다. 산동성 공산당과 공안기관이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무장한 민간인들 몇 십 명이 그 집을 둘러 싸고 있어 중국 인권운동에 동참하는 동지들이나 외국의 인권 옹호 단체원들 그리고 외국인 기자들이 그를 만날 수 있기는커녕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번 탈출은 천 변호사가 며칠 동안 아파서 누워있다는 시늉을 한 탓에 경비원들이 약간 방심한 것을 이용해서 한밤중에 뒷담을 넘어가서 결행되었는데 그는 미국대사관으로 향하기 전에 북경의 모처에서 인터넷으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에게 공개 비디오 메시지를 보냈다.
원자바오에게 보낸 메시지의 첫째 요구는 산동성 공산당과 공안당국자들의 지시를 따르는 민간 복장의 괴한들 70여명이 자기와 자기 가족을 연금하는 정도를 넘어 자기들 부부는 물론 자기의 노모까지 여러 차례 때리고 학대하는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니 거명된 공산당 간부들 및 하수인들을 법에 따라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이불에 싸인 채 구타당해 늑골이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입었으나 의사한테 가는 것조차 막았다는 내용과 아울러 심지어 10살짜리 아들이 학교에 오고갈 때조차 세 명이 따라다니면서 책 한 페이지마다 넘겨볼 뿐더러 하교 후 집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니 천 씨와 그 가족의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집의 전기마저 작년 7월29일에 끊겼다가 12월14일에나 연결되었다니까 연금 상태가 감옥보다 덜 불편할 것도 없다.
천 씨의 둘째 요구는 자기 가족의 안전을 법에 따라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동성 지방) 관리들의 심각한 부패와 권력 남용을 법에 따라 처단해 달라는 것이 그의 셋째 요구이다. “원 총리님,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불법 행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런 행위들이 지방관리 자신들의 불법적 행동인지 또는 중앙정부의 지시 아래 하는 일들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총리께서 확실한 대답을 인민들에게 곧 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철저한 조사를 해서 인민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총리께서 이것을 계속 무시하신다면 인민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라는 것이 천 씨의 결론이다.
아마 천 씨 자신도 공산당원이지만 소련의 고르바초프처럼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 자신은 미국으로 망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보도이다. 법을 통한 개혁 운동이 중국에 있어야 가능하다는 착상일 것이다.
5월1일 미 대사관이 중국 관리들과 협상 결과 천씨 그의 가족이 안전하게 살면서 천씨는 대학 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발표는 문자 그대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논란 대상이 되었다.
중국 외교부가 미국 대사관에서 그를 엿새 동안 숨겨둔 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강경세를 보였고 천씨의 변호사는 천씨가 대사관에서 나온 것은 부인이 맞아 죽을 것이라는 위협 때문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천씨와 그 가족의 미국 망명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좌우간 천 변호사는 중국의 주목할 만한 인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