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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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

2012-04-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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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A 선생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투병 중이신 B 선생이 병세가 악화되어 수명연장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며 “하늘나라로 편히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B 선생의 병세가 하루하루 깊어진다는 것을 멀리서도 느끼고 있었는데, 복숭아 꽃, 살구꽃이 하룻밤 사나운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듯 허망한 소식이었다.

평소에 알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는 일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 나이에도 작가들의 부음이나 투병소식은 유난히 마음을 적시며 스산하게 다가온다. 세월을 대면하며 겪는 일상적 사연들이 그 자체로 문학적 서사임을 보여주며 삶의 갈피를 잡아 주던 작가들이 우리 곁을 떠났거나, 떠날 차비를 한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문단의 한 축을 이룬 B 선생은 여류 문인이다. 그분은 순수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정이 많아 독자들의 친구였다. 수수한 모습이 그랬고, 외로운 생애가 그랬고, 비수를 감춘 단단한 문장이 그랬다. 중병을 앓으면서도 혼신을 다해 책을 내시며 참으로 치열한 문학 정신으로 온 몸을 불태우셨다.

몇 해 전 그분과 같이 여행을 했던 일을 나는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호텔 방에서 편한 모습으로 마주 앉아 인생과 문학을, 진실어린 사랑의 속내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던 그 때가 지금껏 내겐 향기로운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이 시대를 그분과 동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오늘날에도 어찌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목숨이다.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없는 생명, 생명은 단 한 번밖에 가질 수 없는 일회성이다. 나는 아침마다 제 시간에 잠이 깨는 생명의 신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오래 일하며 사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기에 많은 의학자, 과학자, 철학자들이 거기에 대한 비방을 줄줄이 내놓고 있지만 목숨만은 하늘의 뜻이다. 사전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빼버리라고 자신만만하던 나폴레옹도 자신의 목숨만은 연장하지 못한 채 외로운 섬, 세인트헬레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토록 돈으로도 권력이나 의지력으로도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이다. 그러나 사람이 힘이 미치지 못하는 존엄한 생명도 신의 은총을 입으면 소생의 기적이 일어난다. 기도로 질병의 아픔에서 치유되고 새 생명의 꽃을 피운 기적에 대해 우리는 알고 있다.
육신의 아픔을 경험 했거나 겪고 있을 때, 사람들은 절실한 심정으로 인해 인생관이 바뀌기도 하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기도 한다.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오며 마음의 눈이 떠져 개안 수술을 받은 것처럼 된다.

다시 돌아온 생명의 봄날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아픈 사람들,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봄바람은 은혜롭다. 내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절실하면 강해진다. 간절한 기도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다.


김영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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