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페이스 메이커

2012-03-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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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청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잘록했던 허리는 온데간데없고, 조금씩 늘어난 옆구리 살이 청바지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운동이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프를 배워볼까? 시간이 없어서 패스. 수영을 해볼까? 물이 싫어 안 되겠다. 다행히 산을 좋아해 주말마다 등산을 하지만 매일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해 결국 달리기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동네 가까운 마라톤 동호회에 들어가 한 걸음 한 걸음 시작하다 보니 벌써 롱비치 마라톤, 헌팅턴 마라톤을 두 번이나 완주했고 지금은 오렌지카운티 마라톤을 연습 중이다. 마라톤을 하면서 느낀 것은 혼자서 뛰는 게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것보다 배로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같이 호흡하며 달릴 수 있는 동료를 만나 훨씬 수월하고 재미있게 운동을 하고 있다.


잘 하는 사람이 앞서 나가면 그의 등을 보며 힘을 내 쫓아간다. 지칠 땐 손을 잡아 끌어주기도 하고 목 마른 사람에게 물도 챙겨주며 뛰다 보면 어느덧 결승점에 도착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을 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하기에 더 쉽고 즐겁게 목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 한국 영화 ‘페이스 메이커’를 보았다. 영화에서 소개된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톤과 같은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 후보자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된 선수를 말한다. 즉, 이들은 오로지 남의 1등을 위해 달려야 하는, 메달을 목에 걸 수 없는 국가대표인 것이다.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완주를 위해 출전하여 승리를 돕는 이가 있다는 걸 알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우승이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페이스 메이커와 우승 후보는 그렇게 서로의 희생과 노력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지난날을 보아도 그렇다. 모든 걸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좀 더 유쾌하고 편한 것 같다. 대표적인 예로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살아가는 부부의 삶이 그렇지 아니한가? 내 옆에 페이스 메이커 같은 남편의 존재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건강히 웃으며 살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인형을 사도 하나 보다는 두 개를 사서 나란히 올려놓는다. 둘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길을 홀로 외발로 걸으려면 힘에 부친다. 불완전한 외발들이 만나 서로에게 기대게 하는 것이 부부이다. 그리고 서로 튼튼한 두 다리가 되어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 힘을 준다.
부부는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대방에게 양보와 희생을 아끼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발 맞춰 함께 뛰는 그러한 존재 말이다.

간혹 배우자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사랑을 전하는 게 쑥스러워 표현을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지 말고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숨이 차지만 당신을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며 열심히 달리고 있는 배우자를 위해서 말이다. 또한 당신도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해 존재하는 훌륭한 페이스 메이커가 되었으면 한다.


제니퍼 리
듀오 LA 커플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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