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월의 뜰

2012-02-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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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면 생각나는 시가 있다.

“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있는 그 자리에/ 어느 덧 벙글고 있는 꽃..”

오세영 시인의 ‘2월’이란 시의 몇 구절이다. 벌써 2월이다. 떠밀리듯 마지못해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 벌써 2월이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세월의 속도감에 주눅 들어 산지 꽤 오래되었다. 이 나이 되어도 늘 지각하는 아이처럼 허겁지겁 쫓기듯 달려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동안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바쁜 게 열심히 사는 건 줄 알았다. 새벽밥 먹고 직장 가서 종일 정신없이 지내다가, 저녁이면 시간 반이나 떨어진 한의 대학원에 다닌 지 해를 넘겼다. 주말엔 밀린 집안 일, 친지들 보는 일과 교회 행사 등으로 더 바쁘다.

그런데 돌아보면 마음만 부산하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았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눈에 보이는 성과물에 대한 집착으로 기도와 명상의 시간들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 되었다. 요즘은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불안할 정도다.

“세상맛에 푹 빠지면 바쁨을 구하지 않아도 바쁨이 절로 이르고 세상맛에 덤덤하면 한가로움에 힘쓰지 않아도 한가로움이 절로 온다”
우연히 펼친 신문 모퉁이에서 만난 이 한줄 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옛 명나라 시인의 글이라는 데 관심이 밖으로 향해 있으면 바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마음이 내면을 향해야 비로소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바쁘기를 구하는 것(多忙)과 한가로움에 힘쓰는 일(愉閑)은 순전히 세상일에 대한 관심 정도에 따른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한가로움의 의미를 글 말미에 한문학자은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옛 글에 마음이 소란한 소치는 저마다 영위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사꾼은 이문을 따지고, 벼슬아치는 영욕을 다툰다. 농부는 밭 갈고 김매느라 여념이 없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날마다 궁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비록 풍광 좋은 무릉도원에 있어도 팔짱을 끼고 제가 바라는 것만 골똘할 터이니 대체 어느 겨를에 한가로울 수 있겠는가?…”

내가 바삐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관심이 밖으로 향해 있으면 바쁠 수밖에 없다는데 내가 세상 밖에서 얻고자하는 것이 무엇일까? 돈이나 영욕에는 별 관심 없이 살았으니 내가 궁리하는 건 행복한 삶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그 행복을 밖에서 구하려 하며 살아온 게 틀림없다. 직장 커리어에 대한 집착, 은퇴 후 새로운 일에 대한 욕망이 자꾸 나를 세상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휴일 아침, 모처럼 뜰에 나서니 매화와 자목련이 활짝 피었다. 행복은 바쁜 현상이 아니라 한가로운 마음속에 피어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2월의 뜰.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 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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