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찌히 선교 컨퍼런스 지상중계 2//
2012-02-23 (목) 12:00:00
동독의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분 가운데 하나인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uhrer^사진) 목사. 그의 이름을 번역하면 ‘기독교인의 지도자’란 뜻이다. 자신의 이름처럼 그는 라이프찌히 기독교인과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로서 ‘동독의 무혈혁명’을 최전선에서 이끈 사람으로 평가된다.
‘칼을 쳐서 보습을’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그는 세계 평화와 동독의 민주화를 위한 월요기도회를 1981년에 시작했다. 10여명 남짓한 숫자로 출발한 기도회는 수 백명으로 불어났고 1989년 10월에는 6.000여명의 인파가 교회로 몰렸다. 이들이 교회 밖에 있던 7만여명의 반정부 시위대와 결합돼 촛불을 들고 행진을 하자 동독 당국은 경찰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철저한 ‘무폭력’ 원칙을 지키는 시위대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듬해인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치러지게 됐고 동독 혁명은 ‘기도와 촛불’을 통해 달성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지만 누군가 희망을 보여줘야 하고 그것은 교회의 일”이라며 “자신의 행동은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신앙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교 컨퍼런스에 초청된 퓌러 목사의 강연을 요약 정리했다.
당시 비폭력 원칙을 세운 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40년간 나치 사회주의 밑에서 생활한 사람들에게 비폭력은 쉽지 않았다. 7만명이 모였을 때 두려웠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쳤다. 당시 경찰은 “모든 것을 대비했으나 촛불은 예상 못했다”고 밝혔다. 우리도 무력 진압을 예상했었다. 이같은 결과는 놀라운 일이었고 성령이 가능케 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당시 국제상황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1980년 폴란드에 노조가 형성됐고 소련에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했다. 그는 2005년 평화상을 받을 때 독일의 통일운동에 관련된 질문을 받자 “동독의 내적인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고 밝혔다. 1989년 호네커 서기가, 11월에는 정치 간부들이 물러나는 등 상황이 급변했다. 마지막 문제는 독일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는데 사실 11월9일을 원하지는 않았었다. 그 날은 1938년 유대인 회당을 불태우는 등 유대인을 박해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은 동독에서부터 열렸다. 탱크가 아니고, 미군이나 소련군이 아니고 국민들이 해낸 것이다.
요즘 서울에서도 평화 시위와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교회의 역할은 기도하는 일이다. 북한 내 크리스천들과 연결이 된다면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 남북 통일은 꼭 경제적인 이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믿음과 자유가 더 중요하다. 1981년부터 시작한 기도운동은 고독한 것이었지만 나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아내와 자녀들의 격려, 교회 성도들의 동참이 큰 힘이 됐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한국의 통일이 동서독과 똑같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실 것이다. 기도를 중단하면 희망이 없다.
<이병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