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병상의 하루

2012-02-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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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게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열과 기침과 어지럼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같은 교회 교우가 보내온 정성스런 음식들로 한결 기운이 났다. 병원에 3번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강도 높은 약을 쓴 후에야 겨우 숨 쉬는 것이 부드러워지고 답답한 가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잠이 깨어 소파에 길게 누워 말러의 심오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잊어버렸다. 2012년 올해는 말러의 해인가? 정명훈이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2년에 걸쳐 지휘하고, LA 필하모닉의 구스타프 두다멜도 말러의 교향곡 9곡을 완주했다.

깊고 완벽한 고전음악의 정수를 들으며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린다. 남편이 화단을 손보고 있었는지 “바깥 날씨가 기막히게 화창한데 꽃구경하러 나오라“고 성화다. 아직 바람 끝이 차가우니 재킷을 걸치고 입을 막고 나오란다.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톡톡 튀는 햇빛과 코끝을 때리는 상큼한 바람, 자스민 넝쿨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제라늄과 여러 꽃들이 마치 봄이 온 듯 색색으로 피어있다.

감기를 안고 지내느라 오랜만에 나와 본 뒤뜰에서는 새로운 생명들이 햇빛과 물과 공기로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신비디움의 잎들이 엉켜있는 화분들에서 난꽃 줄기 여러 개가 솟아 나와 손을 흔들며 청초한 자태를 뽐낸다.

감기로 침울했던 집안분위기와 다르게 뒤뜰의 자연은 자연의 법칙대로 왕성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선하고 맑은 자연이 눈부시게 생명을 찬양하고 있는데, 지구촌의 사람들은 자연을 외면한 채 더 불행해 지는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로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시리아… 저 멀리 다른 항성에 존재하는 것 같던 나라들이 이제 아래동네 골목처럼 귀에 익어 그들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닌 지구촌 바로 우리의 일이 되어버렸다.

경제라는 십자군이 70억 인류의 삶을 정복한 지금, 지구촌은 만인과 만인의 무한경쟁 사회가 되어가고, 너나 할 것 없이 생존을 위한 백미터 경주의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어려움을 초월하는 지혜를 찾아 현재의 삶에서 행복한 마음의 귀향을 꿈꿔본다.

모든 지혜의 본질은, 행복은, 단지 사랑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헤세는 좌절과 방황의 시절에도 참으로 기쁜 행복을 조용히 자연사랑에서 구했다.


헤세는 일생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사색을 했는데,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전 과정을, 죽음까지도 하나의 삶의 과정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태양이여, 흙이여, 사랑이여, 삶이여, 내 작은 뒤뜰의 생명들이 자연이라는 어마어마한 신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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