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눈산의 6달러

2012-01-26 (목)
크게 작게
‘자고 나니 영웅이 된’ 한인이 있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이명박, 김정은, 반기문보다 ‘김용준’을 아는 미국인이 더 많을 듯싶다. 평범한 워싱턴 주민인 김씨가 시애틀타임스, 타코마뉴스트리뷴, KOMO-TV 등 현지 언론은 물론 워싱턴타임스, 뉴욕데일리, 보스턴헤럴드, CNN, AP, ABC, CBS 등 전국의 수천 개 미디어에 지난 주 톱뉴스로 떴다.

엊그제 이메일을 보내온 서울의 여동생도 “그 양반, 나이도 취미도 오빠와 비슷해 보이는데, 오빠도 산에서 낭패하지 않도록 조심해요”라고 당부했다. 김씨 얘기가 본국 TV에도 보도된 모양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영국 신문 가디언을 비롯해 유럽과 동남아 각국의 미디어 및 구글·야후· 유튜브·페이스북 등 SNS에도 김씨 얘기가 소개돼 있다.

전에도 세계적으로 크게 뜬(?) 한인이 있었다. 2007년 4월 버지니아 공대에서 무차별총격으로 32명을 사살하고 25명에 중경상을 입힌 뒤 자살한 조승희이다. 동포 얼굴에 먹칠을 하고 지옥에 떨어졌을 조승희와 정반대로 김씨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침착성과 강인성이 몸에 밴 한인들이야말로 지옥에서도 살아나올 수 있는 민족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미 본보에 두 차례 상세히 보도됐듯이 타코마 레이니어 산악회장인 김씨(66)는 지난 14일 아침 회원 15명을 이끌고 레이니어 국립공원에서 눈산 등반에 나섰다가 눈 비탈에서 150피트나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고립됐다. 그는 일행과 무전기를 통해 파라다이스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계속 하산했으나 방향감각을 잃고 엉뚱한 계곡으로 내려갔다.

평소의 한나절 등산 옷차림에 야영장비도 전혀 없이 냉장고 같은 눈산에서 밤을 맞은 김씨는 살을 에는 찬 공기와 어둠에 기죽지 않고 눈이 쌓이지 않은 나무 등걸 곁에서 밤새도록 제자리 뛰기를 하며 체온을 지켰다. 날이 샌 뒤 계속 하산하던 김씨는 또 한 번 미끄러져 추락했고,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헤매다가 이틀째 밤을 맞았다.

김씨는 배낭 안에 있던 밥과 녹차가 이미 소진돼 에너지 바와 눈으로 요기하며 그 날 밤도 체온유지에 전력했다. 교회 장로답게 큰 소리로 기도하며 찬송가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을 잇달아 불렀다. 잠깐씩 눈을 붙이면서 생환 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찜질방에 앉아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뼛속에 파고드는 한기를 견뎠다.

조난 당한 뒤 이틀하고도 3시간 반이 지난 16일 오후 2시께 눈산 중턱 해발 6,400피트 지점에서 구조대에 발견된 김씨는 너무나 쌩쌩했다. 그가 ‘당연히’ 동사했을 것으로 간주하고 사실상 사체수색 작업을 벌였던 레인저들도 그의 생존이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구조대의 도움으로 9시간에 걸쳐 하산한 후 병원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귀가했다.

등산 동료이자 본보 전화공사를 맡았던 전화설치 전문가인 김씨에게 뒤늦게 전화로 문안했다. 멀쩡하게 생환한 비결을 묻자 ‘정신력’이라고 잘라 말했다. 매일 운동하며 기른 체력과 월남전에서 터득한 담력, 칼과 라이터 등 비상용품을 휴대한 준비성, 무엇보다도 “주님이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꼽은 후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조난 이틀째 밤 김용준씨는 배낭 휴대품 중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고 마지막으로 주머니 안에 있던 1달러와 5달러짜리 지폐를 불살라 온기를 얻었다. 10초도 안 돼 다 타버려 별 도움이 안 됐고, 괜히 돈을 태워 법을 어겼다는 죄책감만 들었다고 했다. 산속에서 달러가 발휘하는 가치는 같은 크기의 일반 종이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는 얘기이다.


운여춘/ 시애틀 고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