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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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빨래

2012-01-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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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죽마고우 택이로부터 서울발 이메일이 왔다. “친구야, 지난 수년간 대학로에서 크게 히트한 한국 뮤지컬 ‘빨래’ 노래들이다. 1,300회 공연에 25만여명이 관람했다는 토속 뮤지컬의 성공은 아마도 서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가사에 있는 듯하다.

처음 서울살이 지하셋방에서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새해에 빨래를 하는 심정으로 한번 들어 보렴.”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동영상을 좀 더 크게 켜고 귀를 기울인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말 다시 한 번 하는 거야/ 자! 힘을 내..”


뮤지컬 ‘빨래’는 서울 달동네 젊은이들 이야기다. 얼핏 스토리 설정이 브로드웨이 뮤지컬 ‘렌트’를 연상시킨다. 뉴욕의 슬럼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애환을 낙관적인 시각으로 그린 작품이 좋아 영화로도 거푸 보았었다.

그런데 ‘렌트’에선 못 느끼던 내 젊은 시절의 감회가 ‘빨래’에선 비누거품처럼 일어난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이리 길어도 이게 핏줄에 얽힌 끌림이란 걸까.

피난 갔던 부산에서 중학을 같이 다녔던 친구 택이도 어려운 시절을 지났었다. 택이는 기우는 가세를 돕느라 지방대학에 다니다가 뒤늦게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채시험으로 겨우 비집고 들어간 대기업 건축 개발부에서 오직 정직과 성실하나 만으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내가 제대 후 유학길에 오를 무렵, 그는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한국 기업의 고질적인 학연과 지연의 연결고리에서 소외돼 승진코스 밖으로 밀려나 할 수 없이 공기업으로 자리를 옮길 즈음이었다. 달동네 친척집에 얹혀살았었는데 그에게는 그때가 아마도 먼지같이 털고 싶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사이, 눈물과 땀이 범벅 된 성장통을 겪던 시절, 1년에 서너 번, 몸과 마음이 빨래같이 후줄근히 지친 밤이면 미국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속마음을 털아 놓곤 했었다. 젊은 꿈을 어디 두고 왔는지 기억도 안날만큼의 세월이 흘러 이젠 3개 성상이 지났다.

택이는 지난 십여 년간 공기업의 수장급으로 한국 신도시개발의 최고 정책수립자로 일해 왔다. 지금은 한국 우수아파트 심사위원으로, 개발연구소장으로 왕성히 뛰고 있다.

특히 그는 건축과 개발 엔지니어링 지도자 양성세미나에서 바닥부터 올라온 그의 입지전적 경험을 살려 인성과 정직을 강조하는 인기강사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그는 명실 공히 오늘 한국 주거환경 개선의 성공신화를 이룬 주역의 한 사람이 된 셈이다.


지나고 보니 택이는 노래가사처럼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세월을 털어낸 뒤,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고 있다. 인생 빨래를 잘 한 덕이다. “친구야, 지금도 가끔 힘들면 옛날 생각을 하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아직도 나만 보면 중학생으로 돌아가는 택이가 이 뮤지컬의 주연처럼 멋지다.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빠는 거야/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보면 힘이 생기지…/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날려줄 거에요.”


김희봉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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