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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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품고 있는 것

2012-01-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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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중
수필가

주제에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겨울이라고 답한다. 겨울을 좋아하게 된 동기는 몇 가지 이런 것이다.

내 모습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탄력성을 잃어가며 쳐져 내리는 육체를 가리며 감출 수 있는 털옷을 입게 만드는 계절이고, 하늘 가득히 피어나는 수만, 수억만 송이의 희디 흰 설화, 겨울의 꽃인 눈이 있으므로 해서 겨울을 사랑한다. 춤추듯 땅 위로 내려오는 많은 눈들에는 소리 없는 노래가 있고,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시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깨끗한 흰 눈을 노래한 김광균의 ‘설야’라는 보석 같은 시를 읽은 후, 눈 내리는 겨울을 한층 더 좋아하게 되었다.


눈 내리는 날 산과 들은 은색의 세계로 변하고 가지마다 기이하고 아리따운 백화가 핀다. 그 어떤 빛깔이 이 순백의 우아함을 쫒아 갈 수 있겠는가, 높은 것도, 낮은 것도, 고운 것도, 추한 것도 모두 덮어버리며 흰 옷으로 갈아 입혀 주는 하늘 축복의 선물, 눈이 오는 날은 그 빛깔에 취해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눈은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동심에 젖게 한다.

1960년대 겨울은 칼 끝 같은 매운바람이 뼈 속 까지 파고들던 한기로 가난한 서민들의 마음은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요즈음 겨울은 너무 따뜻해 겨울답지 않다. 겨울에도 비가 내린다. 겨울비는 겨울이 우는 것 같다. 나는 비대신 눈을 원하나 사막의 도시에 살고 있어 눈을 보지 못해 불행하다.

강원도 산간지대에 2m가 넘게 내린 눈을 한 번 보고 싶다. 고국을 떠나온 후에는 그런 눈을 실제로는 본 일이 없다. 다만, 영화에서 멋있는 설경의 장면들을 보았을 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길, 러시아의 눈은 낭만적이다. 러시아 소설을 영화화한 ‘전쟁과 평화’ ‘닥터 지바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 영화에서 특히 드미트리 배역을 맡았던 율 브린너가 그의 연인을 만나러 갈 때 그의 외투 위에 목화송이만한 함박눈이 내리던 장면들은 말 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그러나 눈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다른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눈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만큼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눈이 오면 증가 되는 교통사고뿐만 아니라 , 비닐하우스나 인삼밭의 발을 파괴해서 많은 피해를 입힌다. 눈 은 두렵고 신비한 위력을 지닌 것이다. 두렵고 신비한 위력을 지녔으나 온 세상을 표백하는 강설의 현상은 인간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침을 준다.

은총의 햇살아래 소망의 은빛 날개를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새해다. 내일의 소망은 “눈이 오는 날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다. 온갖 잡스럽고 치기어린 다툼의 추악한 것들, 쌓고 모으던 욕심을 털어버리고 깨끗하게 비운 가슴에 충만한 은총이 넘치도록 받아질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눈이 오는 날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더욱이 그것은 겨울이 품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겨울에 큰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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