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을 속의 엄마

2012-01-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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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무척이나 힘들어 했던 나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이 그녀를 괴롭힐 때면 우리는 여행을 자주 떠나곤 했는데, 어느 날 찾아간 곳이 낙동강 하구에 있는 작은 섬 을숙도였다. 우리는 웬일인지 시장에서 날계란 한 꾸러미를 사 가지고 갔었다. 섬으로 들어서자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멋지게 만든 집을 보고 “바로 저 집이야” 하면서 무작정 생면부지의 집으로 찾아가 민박을 요청하며 사 가지고 간 계란 한 꾸러미를 내어 놓았다.

그 집에는 노부부와 초등학생 손자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을숙도는 닭을 키우지 않아 계란이 귀하다고 하면서. 흔쾌히 승낙을 하여 주었다. 철새들의 도래지인 그 섬의 갈대밭 너머로 해가 지면 온 숲이 다 흔들리도록 날개를 푸드득 거리며 날아오르던 수많은 철새들이 장관이었다. 노을이 물들면 펑펑 울던 그녀의 등을 토닥거린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나 또한 지난 해 11월에 엄마를 잃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늘 곁에 있어주는 줄만 알았기에 그 상실감이 나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 했던 나의 친구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노을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주말에 을숙도처럼 노을과 갈대가 아름다운 포인트 레이스(Point Reyes)에 갔었다. 이 국립 해안 공원은 을숙도처럼 수 많은 철새들이 찾아들고 더불어 순록, 여우, 사슴 등 여러 동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7만4,000에이커나 되는 공원의 여기저기에 솟아 있는 기이한 형상의 암석들에
는 오랜 세월 동안 이끼가 끼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암석들은 이곳에서 3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테차하피 산맥의 암석들과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오랜 태고 적에는 이 두 곳이 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 한 장소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암석의 형제들이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고 수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 쌓여지는 그리움은 과연 어떤 형태의 그리움일까 하고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저녁이 되자 드레익크 비치에 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 해 떨어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때 을숙도의 갈대밭 너머로 빨갛게 지던 노을과 닮은 이곳의 노을 속에 아기처럼 배시시 웃고 계시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여 가슴이 너무나 아려왔다.
얼마쯤의 시간이 더 흘러야 엄마를 편안하게 내 마음 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한적한 바닷가에서 미처 내가 떠나보내지 못한 엄마의 아련한 눈빛이 나의 가슴을 쳤다. 엄마와의 추억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도 추억보다는 당장 엄마의 포근한 체온을 느끼고 싶은 절실함에 나지막이 울었다.

해는 어느 덧 바다 너머로 사라져 버려 드넓은 모래사장은 온통 붉게 물들어져 있었는데 “이제 고개 들고 그만 집에 돌아가렴”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디선가에서 들려왔다.


엘리자벳 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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