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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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자폐아 양육기 ⑫ 나의 새해 계획

2012-01-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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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희(뉴커머스 고교 교사)

프리스쿨 학령기에 있는 나의 아들 에반이는 별로 주변 인물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 왔다.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을 비롯해 도무지 매일 보는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꾸준한 ABA(Applied Behavior Approach-자폐아동을 위한 과학적 교육방법) 교육을 통해 제법 좋아진 눈 맞춤으로 사람들을 보면서도 ‘오리스야 안녕?’이라던가 ‘니콜 선생님!’하고 그들을 부르지 않는다. 상당히 멋진 척을 하면서 그들을 생뚱맞게 쳐다볼 뿐이다.

제한된 언어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에반이니까 주변 인물을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짱구’ 과자나 ‘노란색 새’ 장난감 같은 사물의 이름은 절대적으로 한 번에 기억하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에반의 세상을 보는 눈은 우리와 다르다. 엄마 멋대로 주변 인물 분별력이 없다고 자신의 능력을 규정짓는 엄마에게 이번 새해에 에반이가 크게 일침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에반이의 이종외삼촌이 일주일 남짓 우리
집에 머물고 갔었다. 삼촌이 있을 때는 별로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삼촌이 가고 난 후 방에서 놀다가 난데없이 ‘I want uncle’ 하는 것이 아닌가. 말로 표현은 제대로 못하지만 삼촌과 있었던 것이 즐거웠었던 에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에반이는 ‘내가 다르다고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엄마인 나를 크게 가르쳐주는 순간이었다. ‘어티즘 스픽스(Autism Speaks)’ 후원으로 아이가 자폐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가이드북인 ‘100 day kit’ 한국판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는 리차드 그린커 박사를 작년에 만났을 때 나눴던 말이 기억난다. 자폐를 가지고 있는 그의 첫째 딸이 어렸을 때 그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주변에 도통 관심이 없는 듯해 그 배움의 속도가 더디기에 아이가 어느 순간이 지나서 더 이상 배우지 못하고 그대로 정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된 그녀는 아빠를 따라 대학 캠퍼스에 왔을 때 "저는 그린커씨의 첫째 딸입니다"라고 평소처럼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그린커 교수의 첫째 딸입니다"라고 하기에 왜 교수라는 직책을 붙여 말했냐고 했더니 “지금 우리 아빠가 일하는 캠퍼스에 와 있잖아요”라고 대답을 하였단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빠가 일하는 대학 캠퍼스에 와 있으니 자신은 단순한 그린커씨의 딸이 아니라 ‘교수’ 그린커씨의 딸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커 박사는 그렇게 자폐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사회를 배워나가며 그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딸을 통해 본다고 말해주었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렇다. 나의 2012년의 새해 계획(New Year’s Resolution)은 에반이를 다르게 계속 보아줄 것. 다르다고 과소평가하지 말 것. 다르게 세상을 보면서 엄마를 끊임없이 놀래키는 에반이를 다른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해 줄 것 등이다. 그리고 이 계획을 에반이에게 읽어줄 예정이다. 누가 알겠는가? 2012년 연말이 됐을 때 에반이가 또 난데없이 다가와 ‘엄마! 새해 계획을 안 깼네. 잘했어요’라고 말해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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