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과나무를 심자

2012-01-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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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자 신문에 ‘근하신년’ 광고가 줄을 잇는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고 신년결의를 다지는 등 연초는 으레 활기를 띄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좀 뒤숭숭한 감도 있다. 김정일이 지난 연말에 급사했고, 올해 한국과 미국에서 대통령선거가 치러져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정초부터 ‘지구 종말론’이 고개를 들어서 김이 빠진 모양이다.

올해 12월 21일 동짓날에 지구가 끝장난다는 말은 사실은 어제오늘 비롯된 게 아니다. 지난 2009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헐리웃 영화 ‘2012’가 지구파멸을 실감나게 묘사해 금년이 지구의 마지막 해라는 말에 새삼 기절초풍하는 사람은 없다. ‘심판의 날’(1844년), ‘핼리혜성과의 충돌’(1910년) 등 빗나간 과거 종말론에 면역된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12년 지구 종말론’의 큰 줄기는 마야 달력에서 기인한다. 수천년 간 중남미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온 마야부족은 인류사상 가장 정확한 달력을 만든 수학과 천문학의 천재들이었지만 9세기경 지상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종말론자들은 신비스런 마야달력이 2012년 12월21일까지만 표시돼 있어 그날이 지구의 끝 날이라고 주장한다.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더 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의 해는 1999년이 아닌 2012년으로 재정립됐고, 중국의 주역도 금년 12월21일을 마지막 날로 암시하고 있으며,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사회에 ‘2012년 종말’의 전설이 있고, 올해 태양폭풍이 일어난다거나 행성 X(‘니비루’)가 지구와 충돌할 확률이 높다는 등의 논리를 꼽는다.

성경에 언급된 말세징조들이 빈발한다며 지구 종말이 가깝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엊그제 노르웨이 해안에서 청어 수만 마리가 떼죽음 했다. 아칸소에서도 최근 찌르레기 5,000여마리가 하늘에서 죽은 채 떨어졌고 물고기 10만여 마리가 강에서 죽은 채 떠올랐다. 작년 3월의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등 천재지변이 유난히 잦은 것도 우연이 아니란다.

그러나 과학자들과 NASA(미 우주항공국) 등 관계기관은 늘 그랬듯이 올해 지구 종말론도 일소에 붙인다. 마야달력이 올해 12월 21일로 끝난 것은 새로운 5,128년 주기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고, 동물들의 떼죽음과 천재지변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이며, 지구로 접근 중이라는 ‘니비루’ 행성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지적한다.

마야문명의 후예인 멕시코인들 조차 2012년 종말론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의 해를 맞아 전 세계에서 5,200여만명의 관광객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이들을 상대로 돈벌이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멕시코 정부는 올해 500여개의 마야문명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등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유적지 부근엔 호텔들이 우후죽순처럼 신축되고 있다.

지난달 한국의 한 웹사이트가 실시한 종말론 설문조사에서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올해 종말은 없다’는 응답자가 과반수인 50.6%, ‘있다’는 사람은 7.4%, ‘언젠가는 있다’는 사람이 42%였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찾아온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8.3%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겠다’고 했고, 43.6%는 ‘맛있는 것을 먹겠다’고 답했다.지난 해 달력을 벽에서 떼었지만 세상이 끝나지는 않았다.

달나라 여행을 꿈꾸는 현대인들이 멸절된 마야인들의 석판 달력에 운명을 건다는 건 우습다. 지구의 종말이 있던, 없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자. 스피노자처럼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자. ‘근하신년’ 광고는 12월 21일이 지난 내년 연초 신문에 어김없이 게재된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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