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목요일 새벽 단상

2011-12-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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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지금까지도 으스스 춥다. 오늘 아침은 참 오래 기억될 성 싶다. 매주 목요일은 우리 동네에 쓰레기차가 오는 날이다. 쓰레기통을 내놓는 것은 내 일이다. 수요일 오후쯤 쓰레기통을 끌어다 내놓으면 한갓지고 좋으련만, 당일 아침에야 바쁘게 내놓은 경우가 많다.

오늘도 그랬다. 아내가 오늘 목요일 아니냐고 물어서야 쓰레기통 생각이 났다. 평소 같으면 뒷문을 열고 나갔을 텐데 아내가 출근하느라 마침 차고 문을 열기에 차고를 통해 앞마당으로 나갔다. 문제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모퉁이에 놓아둔 쓰레기통을 끌고 나오는데 아내가 차를 타고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차고 문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어, 어!” 저만치 가는 자동차를 향해 소리쳤지만 금방 사라져버린다. 사람이 밖에 나와 있다는 생각도 없이 습관대로 문을 내리고 떠난 것이다.


둘이 사는 집에서 한 사람이 나가버렸으니 집안에 누가 있을 리가 없다. 졸지에 집에 있으면서도 집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혹시 열린 창문이라도 있는가 싶어 집을 빙 돌아가며 문들을 끄덕거려 보았지만 오늘따라 문단속이 아주 잘 되어 있다.

바람 끝이 차다. 이른 새벽, 간단한 차림으로 밖에 나왔더니 제법 춥다. 집안에 들어가는 길은 출근 중인 아내가 되돌아와서 문을 열어주는 것뿐이다.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옆집에 가서 전화를 빌리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성 싶다. 너무 이른 시간에 집 문을 두드리는 게 결례인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헤르난데스 아주머니가 잠옷을 입은 채로 창문 넘어서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사정을 얘기하고 전화를 빌렸다.

그런데 아내의 셀폰 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럴 수가. 난감했다. 세상에 아내의 셀폰 번호를 기억할 수 없다니. 아들 전화번호도, 딸 번호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소 전화기에 입력된 버튼만 눌러 사용해왔던 때문이리라. 다행히 직장 번호가 생각났다. 이른 아침이라 전화 받는 사람이 없다.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상황을 설명하고 연락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문이 열릴 때까지 자기 집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하지만 괜찮다고 사양했다.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서 있는데 새벽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바람에 쓸리고, 출근을 재촉하는 자동차들이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바삐 달아나고 있다. 이렇게 추운 날 홈리스 피플들은 어떻게 밤을 새울까.

헤르난데스 아주머니가 차 한 잔을 만들어왔다. 밖이 추운데 이거라도 마시라며 위로를 건넨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더운 차 한 모금을 마신다. 몸이 좀 풀린다. 아주머니의 훈훈한 마음이 찻잔을 통해 전해온다. 5년 넘게 이웃으로 살아오면서도 만나면 가볍게 인사나 나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는데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다니. 다급할 때는 이웃만큼 소중한 게 없구나 하는 느낌이 스쳐간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가 되돌아와서 문을 열어준다. 멋쩍은 웃음을 웃더니 늦어버린 출근 시간에 쫓겨 급히 되돌아 나간다. 차창 너머로 아내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보인다. 춥다. 지금도 춥다. 그렇지만 훈훈한 목요일 아침이었다.


정찬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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