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2011-12-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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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고원 문학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플로리다에서 온 수상자 마종기 시인을 만나러 그 장소로 향하는 내 발길은 날개를 달기나 한 듯 경쾌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여러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 반가움을 나누며 문안을 주고받았다. 소설가 이용우 선생의 배려로 시집 한 권이 정갈한 사인을 담고 내 품에 안겨진 것은 자리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김영교 선생께 2012년 늦가을 박만영 드림’. 내 발등의 불을 끄는 일에만 그동안 골몰했었다. 선생님의 체온이 느껴지는 육필을 대하며 찌잉 감전되듯 아파왔다. 속으로 “찾아뵙지 못한 그동안 시집을 펴내시고 치료 입원중이시라니 이 후배의 결례를 용서해 주시지요”하고 빌었다.

지금 병원에 계신 박만영 시인은 92세시다. 다섯 번째 시집 ‘여기에 살고 있다’를 펴내셨다. 우선 감축 드린다. 배경이 병상이지만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조언과 지혜를 담은 시집이다. 모국어 사랑과 자연 사랑 등을 잔잔하게 풀고 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왔고 그 와중에 어찌 시간을 내어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그분의 치열한 자기관리와 단촐, 정결했을 내면세계가 보이는 듯 존경스럽게 여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많은 상념을 불러왔다. 언젠가 따끈한 황남 빵 한 박스를 선물로 안겨주시던 기억이 달갑게 고개를 내민다. 뚫리는 듯 시원한 소통의 현장을 떠나면서 축하박수를 올려드리며 쾌차를 빌었다.

불경기로 직원 수를 줄인 남편 사무실에 도우미로 나가는 일과에다 머릿속은 온통 병원의 시어머니 일로 가득하다. 하루를 비워 글을 쓴다거나 몰두할 때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녹록찮은 현실이 나를 덮쳐 이대로 양보하고 말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든다. 출판기념회나 문학세미나 월례회, 장례식 등 피칠 못할 행사장에도 불참이 잦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자는 일에 치여 부단히 지치고 조금도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부엌일이며 세탁물, 병원 방문 등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함께 흐를 것이냐, 아니면 거슬러 거부와 저항의 몸짓을 할 것이냐의 존재적 갈등 상황을 놓고 고민도 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 말고 일반 생업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자투리 시간에다 자신의 세계를 세워 몰입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힘들고 고귀하고 숭고하게조차 여겨진다.

잠 안 자고 글을 쓰는 일이, 병력이 있어 젊지도 않은 나이에 공연히 몸만 축나지 하는 생각이 압도적일 때가 많다. 시간이 술술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요즘, 이대로 상황에 끌려 다닐 수만은 없다는 처연한 다짐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내가 내 하는 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각성이야 말로 나를 사랑하고 남은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다그쳐 준다. 피 눈물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은 분명 치열하게 삶을 껴안고 뒹구는 사람이지 싶다. 이것이 병상의 선배가 나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김영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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