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사하는 마음

2011-12-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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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청원
내과의사

늦가을의 들녘은 황량하다. 찬바람에 황토 흙이 휘날리는 허허벌판, 그곳의 마지막 열매를 거두어 몽땅 농장주에게 넘겨준 그들은 지친 몸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흙일에 터지고 거칠어진 손과 나누는 악수는 따뜻하다. 그러나 굶주린 가족들에게 줄 것을 마련 못한 빈손이다.

그 빈손이 눈에 밟혀 벌써 10여년째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절이면 9시간을 달려 멕시코의 농촌 샌퀜틴을 찾아온다. ‘추수감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겨울이 오기 전 따뜻한 곳으로 일감을 찾아 떠나야하는 그들에게 추수감사의 기쁨을 나눠주고 싶어서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추수의 감사를 받아야할 것 같아서다.


이곳 현주민들을 위한 의료선교 ‘바하 힐링미션’을 시작한 지도 벌써 13년이 지났다. 금년은 좀 특별했다. 한 가지는 한국에서 온 의대동기 부부가 합류한 일이었다. 연대의대교수이며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인 친구부부는 의료봉사 참여를 위해 그 바쁜 일정을 쪼개 일부러 날아와 주었다.

또 한 가지는 고향 멕시코시티로 돌아가는 현지 자원봉사자 알프레도와의 작별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하얀 피부에 키가 훤칠한 20대 청년이 유창한 영어로 봉사를 자원했다. 현장에서 원주민들의 사정을 알려주고 통역을 담당한지 2년쯤 지난 어느날 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편하게, 내 자신만을 위해 그럭저럭 살았는데 이렇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너무 기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린 보통 두 달에 한번 그곳을 방문해 주민들을 진찰해 준다. 그러나 가끔은 자주 돌보아야 하는 환자가 생겼다. 그때마다 자신의 고물차로 근처 보건소로 환자들을 데려가 그 뒷마무리를 기꺼이 맡아준 것이 알프레도였다.

작년여름 쇄골이 부러진 채 방치해 왼쪽 팔을 못 쓰던 할머니의 경우도 그랬다. 진찰 해준 다음날 떠나야 했던 우리는 알프레도에게 200달러를 맡기고 통원치료를 당부했다. 부지런히 병원을 오간 알프레도의 정성으로 할머니의 팔은 완쾌되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 봉사현장을 찾아와 감사하는 할머니에게 감사는 우리가 아닌 알프레도가 받아야한다고 말했다. 수줍게 웃는 알프레도의 얼굴은 노력한 사람만이 갖는 보람으로 환하게 빛났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는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가 ‘참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금년 추수감사절에도 의료봉사를 마친 우리는 LA의 한 고마운 이웃이 준비해준 갈비를 구워 저녁상을 차렸다. 갈비는 이곳 주민들이 가장 기대하는 인기 메뉴다. 한국에서 온 친구는 한국어로, 이어서 알프레도는 스패니시로 감사기도를 드렸다. 서로가 이해 못하는 언어였지만 절대자를 향한 간절한 염원은 그 절절한 어조만으로 모두에 마음에 가 닿은 듯 했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길에 쓰러진 사람을 누가 집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밥 한 그릇을 주었지요. ‘아, 이게 밥입니까…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그는 밥을 먹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이 한없이 평화롭게 보였답니다”

가난하고 누추하지만 감사할 줄 아는 영혼과 자신들만의 화려한 성에 들어앉아 천국과 극락의 모든 복을 달라고 청하는 사람들…당신이 신이라면 누구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금년에도 우리는 가난한 그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의 참뜻을 다시 한 번 배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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