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도미 야스사에몬 이야기
2011-11-24 (목) 12:00:00
지난 주에는 ‘워싱턴 일본 크리스천교회(Washington Japanese Christian Church, WJCC)’의 우에하라 다가시 목사님이 교회 주보와 곁들여 마스도미 야스사에몬(陞富安左衛門)의 얘기를 보내 주었다. 일본의 저명한 종교 작가인 구로세 야스나리의 저서 ‘알려지지 않은 현교(懸橋)’에서 발췌 하였다고 설명돼 있었다.
1906년, 이야기의 주인공 야스사에몬이 젊은 나이로 한국에 건너와 한반도의 남쪽 전라북도에서 농장을 경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의 일이었다. 때는 조선의 통치자 고종이 오랫동안 닫혀있던 쇄국의 빗장을 열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지 6년이 되어 농장이 다소 안정될 무렵 그는 이웃에 사는 미취학 아동들을 위해 초등학교를 세우기 시작 하더니 5년 후에는 다시 교회와 중학교까지 설립하고 농장에서 나오는 전 수익을 학교와 교회운영에 쏟아 부었다.
이미 기독교를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 아내의 영향으로 1910년에는 30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으며 자기 수련과 연찬을 위해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여 고우베 신학교에 입학하고 있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조선의 기독교는 조선인의 손으로, 그 선교 또한 조선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라는 기치를 들고 뜨거운 선교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10년에 있었던 일본의 한국 강압 합병에 항거 독립운동을 하다 퇴학당한 학생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가 설립한 중학교에 입학시키게 하는 한편 젊은 사람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어 신학교에 보내면서 많은 학생들을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외지에 나와 돈을 벌면 금의환향 고향에 돌아가 거들먹거리는 것이 통속적이었던 당시의 시대상과 비교할 때 그의 행적은 달랐다. 결코 정복자의 편에 설 수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요 오만자약한 지배자 의식을 갖지 않았던 일본의 양심이었다. 그가 1934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희귀하고 특별한 일본 사람이라 숭앙을 받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냉대와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그의 선행은 망각의 세계에 숨겨 진 채 세월은 흘러갔다. 세계 일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독재자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대전도 4년 반을 끌다가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은 해방이 되고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
마스도미 야스사에몬이 보낸 고우베 신학교 유학생 가운데 생존해 있던 3인의 목회자들은 그들 믿음의 선배요, 한국 복음의 전도사 마스도미 야스사에몬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나가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리하여 1970년에는 그가 설립한 중고등학교 교정에 찬송비가 건립되고 그의 서거 60주년에는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서울에 있는 영세교회에 모여 그의 추도예배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어 1995년 한국 정부에서도 그의 국경을 넘어선 인류애에 공헌한 참뜻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한국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고 일본 식민정책에 의해 몰락의 길을 강요당했던 한국 사람들을 자기의 형제자매라 부르며 같이 손을 잡고 한국을 위해 기도했던 한 이방인, 그는 바로 그 나라 명치인이 가졌던 참된 의협심을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으로 승화시킨 시랑의 전사요, 슬기로운 이웃이었다. 감사의 계절을 맞아 깊은 존경과 찬양의 뜻을 그에게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