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의 가을걷이

2011-11-2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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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가을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노란 단풍잎, 산뜻하고 따사로운 햇살은 빨간 단풍잎들을 더욱 투명하게 비추고, 결실의 계절을 실감나게 하는 여러 가지 열매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요즘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의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가지런히 널려 있는 무말랭이, 얄팍얄팍하게 썰려서 대나무 채반에 말리어져 하루가 다르게 돌돌 말려가는 호박고지들, 창문 안쪽까지 길게 드리우는 햇살이 아깝기라도 하신 듯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한 장 한 장 정성껏 뒤집고 또 뒤집곤 하신다. 그리고 뒤꼍에는 빨랫줄처럼 긴 노끈을 매고, 열십자로 칼집을 낸 가지와 무청 시래기를 삶아서 빨래 널듯이 널어놓으셨다.
이젠 제 수명을 다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이파리들이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는 고추나무에서, 고춧잎들을 모두 훑어내어 이삼 일을 물에 담가 풀물을 뺀 다음 조선 간장을 부어서 장아찌로 담가 놓으셨다.
이 모든 재료들이 어머니의 손끝에서 겨울 저장 식품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감탄스럽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오신 어머니는 올 해로 일흔 번의 가을걷이를 해 오고 계신다.
지난 여름 미국에 오실 때 내가 이 나이에 미국이란 데를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걱정이 많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아마도 가을 걷이는 생각지도 못 하신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어머니께서는 절망 속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 내듯이, 삶의 열정을 보이신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뒤꼍에 심어놓은 미나리를 둘러보시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여기는 가는 데마다 다 내장산 가는 길 같다. 얘, 에미야!” 하시며 나름 미국 생활에 열심히 적응하고 계신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치미 무를 사다가 어머니의 특기인 동치미를 담근다고 하신다.
나는 벌써 부터 혀끝에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어머니의 물김치를 이웃 사촌들과 나누어 먹을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겨울밤, 온 가족이 벽난로 가에 둘러 앉아 시원한 동치미와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일제와 한국 전쟁 시대를 거치며 이제까지 살아오신, 어머니의 못 다한 긴 옛날 이야기를 밤새도록 듣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내년 이맘 때도 우리 곁에서 변함 없이 어머니의 가을걷이가 계속 되기를 겸허히 기도드린다.


김경숙 / 워싱턴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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