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입의 열매

2011-11-04 (금) 12:00:00
크게 작게
어느 모임에서 생긴 일이다. 점심 시간에 늦는 바람에 긴 줄 맨 꽁지에 붙어 섰다. 부지런히 식사 당번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우리가 선 두 줄은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느리기만 했다.
소홀히 했던 아침 식사를 뉘우치며 오늘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후로는 매끼니 때마다 필요한 만큼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뉘우치며 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뒤에도 내 앞줄만큼이나 긴 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다들 기다리는 사정은 같은 모양으로 피곤해 마른 갈대가 된 사정이다. 줄을 서서 서로가 같은 형편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 누구도 나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서 있다. 서로가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불문율의 제도이다. 아무리 바빠도 줄은 그 당시의 법으로 나중에 온 사람이 급하다고 사람들 앞에 서거나 중간에 끼어들 수 없다.
내 줄 앞 중간에 서 있던 친구가 늦게 와 줄 옆으로 왔다갔다하며 어디 중간에 끼어들 자리를 찾고 있는 자기 친구를 큰소리로 (이리와) 부르더니 자기 앞에 세운다.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으로 곧 잊어버렸다.
식사를 받아 가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신나는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찾아간다. 식사 당번은 밥을 퍼주느라 바쁘고 들고 가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느라 바쁘다. 언제나 식사시간은 즐겁고 바쁜 시간이다.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우리 줄 옆에서 왔다갔다 공간을 찾는 사람을 아까 그 친구가 팔로 잡아끌어 또 자기 앞에 끼워 세운다. 급할 때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양해를 얻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때 누군가 약간 미안한 말투로 “순서대로 섭시다.” 아무런 양해도 없이 하나도 아닌 둘을 무작정 끼워 넣는 일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짜증이 나게 한다.
“저울에 달고 자로 재네.”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 전언에 사람은 말의 열매로 복 받는다고 했는데 양해를 얻는 대화에서는 얼음이 물이 되어 녹는 것 같이 해결책은 있을 것이고 힘들지만 조금은 양보할 마음에 짬이 생길 것이다.
화장실에 가니 짧은 줄이지만 두 줄, 석 줄 만원이다. 내가 뒤에 붙어 서자 잠시 후 누가, “아이쿠, 나 급한데 먼저 좀 들어가게 해 주세요. 누구든지 좀 양보해주세요.” 체면 불구하고 큰 소리로 외쳐 댄다. 그러자 줄 앞에 섰든 사람들이 “이리 오세요, 이리 오세요” 하며 서로 양보하겠다고 나선다.
또 다른 사람은 “아무 데서나 먼저 나오는 대로 들어가세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이 바닥에다 실례를 하면 우리만 손해지 뭐” 하자 때 아닌 웃음보가 터졌다.
마침 저 안쪽에서 누가 나오자 지체 없이 급한 사람이 무작정 뛰어 들어 갔다. 문제가 없다.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우리는 한 사람에게 양보했는데 급한 불을 끄고 가는 그 사람은 줄서 있는 모두에게 큰 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가벼운 걸음으로 갔다.
가끔 양보하는 일이 즐거울 때도 있다.


하순득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