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죄의식마저 든다. 선생님 생전에 잘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정옥희 선생님은 나의 국어 선생님이셨어”하고 자랑하며 살아온 나. 선생님은 나의 첫 시집 ‘바람의 짓’ 평을 써 주시기도 했다. 늙은 제자의 등을 쓸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그래, 좋은 글 많이 써요” 하셨다.
“저녁 대접을 하고 싶어요” 하면 선생님은 늘 “그러지 마. 바쁜데 이다음에 하자”며 줄곧 피하곤 하셨다.
몇달 전 선생님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듣고 “제게 책 한 권 안 주실래요?” 했더니 그때는 선뜻 “그래, 데이트 한 번 하자” 하셨다. 책을 우편으로 부쳐 주려다 직접 만나고 싶어 그만 두었다고 하셨다.
그때 뵈니 “늙으니까 아픈 곳이 늘어”하실 뿐 자세한 말씀이 없으셨다. 얼굴은 수척해도 스타일은 항상 그대로여서 “나이 드셔서 그러시겠지” 했다.
선생님은 그때 다시 못 볼 것이라 예상하셨던 것일까? 그토록 안 만나 주시더니 그날은 멀리까지 나와 만나주셨다. 눈물이 나도록 반가웠다.
“선생님, 무얼 드실래요?” 했더니 간단하게 먹자고 하셨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 마켓 안의 식당으로 가셔서 떡볶기를 사고 김밥을 사셨다. 돈도 재빨리 지불하셨다.
“참 먹고 싶었어. 아이들이 매운 거 먹지 말라고 해서 못 먹었는데 자네를 보니 갑자기 회가 동하는 구나. 옛날 학교 앞 떡볶기 집에 학생들이 몰려 있으면 사감 선생님과 같이 가서 수첩에 학생들 이름을 써들고 돌아 섰지만 실은 그때 나도 무척 먹고 싶었어.”
말씀하시는 선생님 눈가에 순수하고 아련한 향수가 반짝하고 퍼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중국집에 몰려 앉은 학생들을 단속하러 갔다가 오히려 같이 앉아 먹으며, “얘들아 정말 맛있구나” 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젊으셨던 선생님, 왜 안 그랬을까’ 생각하며 나도 같이 웃었다.
언젠가 ‘4.19를 보내며’라는 글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을 때였다. 숙제 안 해온 학생들에게 운동장 가장자리의 풀을 뽑으라는 벌을 주시면서 “잘못 가르친 나도 벌 받는다”며 선생님도 같이 풀을 뽑으셨던 기억이 난다.
숙제를 안 해오면 점수를 깎는 것이 아니라 덤으로 글 한편씩 더 써 오라던 선생님, 그래서 우리 말썽꾸러기들이 감히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된 것 같다.
“애들아” 불러주시던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 이제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서운해서, 서운해서 마음이 무겁다.
“선생님, 가신 곳에서는 숙제 내주시지도 마시고 하지도 마세요. 그저 평안히 잘 계십시오. 저희들의 영원한 국어 선생님, 정옥희 선생님.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