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사 가는 날

2011-10-12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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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호 시인, MD

오늘은 암만해도
손(損) 없는 길일(吉日)인가 보다
집안에 누워 있던 세간들이
모두 멱살잡이로 끌려나와
대문 밖을 외워 싸고 있다
오랫동안 손때 묻은 가구들
주인 살림 지켜준 잡동사니들
흥분과 불안에 포로 되어서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주인을 따라 갈 수 없는
낡은 가구들은 쓰레기장 옆에서
몸을 떨며 볼품없이 울고 있다
엄마와 떨어지는 아이처럼
저 울음소리를 들은 적 있었지
골목길 지날 때마다 살려달라는
버림받아 무너진 가구들의 목소리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주인들은
한때 기억들을 사리(舍利)처럼 담고 있겠지
세월에 깎이고 무디어진 것들
긁힌 모서리마다 얼룩진 상처들
숙연하게 느껴지는 조용한 허탈감
대문 앞 쓰레기더미에 묻혀
평화가 얼룩진 세월의 상흔(傷痕)
골목마다 오늘은 암만해도
손(損) 없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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