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웰컴 투 와이오밍

2011-09-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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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시몬시또 안녕! 올해도 어김없이 생일카드가 왔다. 35년째다. 와이오밍에 사는 엘비라로 부터다. “내 사랑,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엘비라는 옛 상사, 밥의 미망인으로 올해 81세다. 그들은 우리가족과 만나던 순간부터, 당시 갓 돌 지난 큰아이를 조카로 삼고 시몬시또란 애칭으로 불렀다. 이제 시몬이 30중반을 넘어 애기아빠가 되었지만 그녀의 사랑은 한결같다. 콜로라도의 강물처럼, 옐로스톤의 달빛처럼…….

엘비라를 처음 만났던 그해 겨울은 참 추웠다. 미국을 모르던 우리 세가족의 마음은 더 추웠다. 미네소타에서 공부가 끝난 직후 첫 직장이 와이오밍 주 환경청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 오지에 가느냐고 주위에서 말렸다. 그러나 막 첫아이가 태어난 그해 살 방도를 찾아 50여 군데 보낸 취업원서 중 딱 한군데 연락 온 곳이 와이오밍이었다. 이왕 미국에 살기로 했으니 가장 미국 깊숙이 촌동네로 들어가자고 결심했다.


낡은 차에 세간살이를 싣고 소도시 샤이엔에 도착했다. 눈보라 흩날리는 오후였다. 약속한 피자집 앞에 희끗한 백발의 훤칠한 백인 신사가 서 있었다. 나를 뽑아준 새 보스 밥임을 직감했다. 그의 손엔 놀랍게도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옛날 한국에서 보던 선교사의 선한 눈이었다. 동양에서 막 내린 노무자처럼 생경했을 나를 그는 환한 웃음으로 포옹하며 맞았다. 웰컴 투 와이오밍.
아담한 그의 집은 언덕배기에 있었다. 행주치마를 두른 금발의 부인, 엘비라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아파트를 구할 때까지 우리랑 함께 지내요. 우리도 할머니랑 단출한 세 식구니까.” 부엌에선 구수한 찌개 냄새가 났다. 투박한 질그릇처럼 생긴 큰 그릇에서 야채 스튜가 끓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을 대접한 스튜그릇일까? 그릇에는 주홍색 유약으로 쓴 글이 보였다. 웰컴 투 와이오밍.

저녁이면 밥은 작업복을 입고 내 낡은 자동차를 수선했다. 고장이 하도 잦아 이름도 못 잊을 69년 형, 머큐리 몬티고. 그는 차가운 차고 바닥에 누어 내 낡은 자동차를 밤늦도록 수선했다. 밥은 엔지니어답게 꼼꼼히 설명해주며 고쳐나갔다. 그 날부터 나는 미국 와서 처음 숙면을 했다. 엘비라가 끓여준 스튜 맛처럼 포근한 잠이었다.

몇 주 후부터 밥은 나를 데리고 와이오밍 주 전체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오일파동으로 에너지 붐이 일었다. 유전과 광산이 산재한 와이오밍은 에너지 개발의 중심지였다. 굴지의 회사들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거리를 좇아 수만 노무자들이 몰려들었다. 따라서 환경문제가 급속히 대두되기 시작했다. 환경청이 빠르게 팽창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월이 가면서 밥은 내게 훈련과 책임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그가 주 환경국장으로 승진하면서 동북지방의 수질 관리 책임자로 나를 발령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무슨 배짱으로 백인 일색이던 그곳에서 30도 안된 나를 그런 요직에 앉혔는지 모르겠다. 비록 머리가 다 빠질 만큼 고생했지만 수년 후 내가 캘리포니아의 원하는 직장으로 옮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어제 엘비라에게 전화를 하였다. “시몬시또가 지난 달 애기를 낳았답니다. 지금도 그 야채스튜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엘비라의 웃는 소리는 옛날과 꼭 같다. “시몬의 아들은 시몬시또 주니어라고 부를게요. 내년에 오면 내가 또 스튜를 끓일 수 있지…….”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웰컴 투 와이오밍 그릇을 꼭 쓰셔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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