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토리 할아버지

2011-09-01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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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별 일 없으면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내와 함께 우리 아파트의 주위를 산책한다. 참으로 이상적인 코스이다. 그리 높지 않는 야산에 적당한 오르내림의 길이 숲 속을 가르마 타 놓은 듯 잘 만들어져 있다. 요즘 시간 아침 6시쯤이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 산책길을 밟으면서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상쾌한 숲 속의 새 공기를 마시며 산새들의 맑은 울음소리와 서덜을 맴돌며 흐르는 작은 도랑물 소리, 부챗살처럼 쪼개지는 햇살이 덮은 엷은 안개를 헤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Good morning,”“좋은 아침”이란 기분 좋은 인사로 시작하는 하루의 일과, 정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산책하는 이 지역에는 도토리나무가 많다. 수 십 년 묵은 참나무들이 진한 녹음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올해도 도토리가 가지마다 땡글땡글 많이 열렸다. 다람쥐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벌써 산책길에 도토리가 툭툭 떨어져 뒹군다. 브라운 색 베레모 같은 깍정이를 쓴 채 제법 굵은 씨알들이 머리에 어깨에 떨어지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이 또한 산책길의 아름다운 운치라고 생각한다.
가을이면 한국의 참나무들은 엄청난 수난을 당한다. 도토리 묵 때문이다. 도토리 묵에는 천연적으로 타닌 성분이 많으며 다이어트에, 특히 중금속을 제거하며 항암효과가 있다고 해서 선호하는 식품이다. 나무마다 극성스러운 아낙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흔들고 바위 돌로 찍어 생채기를 내며 도토리 줍기에 넉살 나간 사람들 같다.
이곳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이곳 노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국 할머니들이 한국 같이 생각하고 삼삼오오 자루에 도토리를 담아 와 묵을 쑤어 먹으며 팔기도 한다. 이맘때가 되면 내게 공연한 걱정거리가 생긴다. 정말 쓸데없는 지나친 노파심이다. 어쩌면 주제넘다고 눈먼 욕을 먹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다. 그것은 이 할머니들이 나와 같은 노인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법은 자연환경훼손에 대한 규제가 만만치 않다. 숲 속의 풀 한 모숨, 야생화 한 송이 함부로 꺾을 수 없다. 어쩌다 운이 나쁘면 자연환경 훼손죄로 뜻밖의 봉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미국인)들은 도토리, 밤 등을 다람쥐와 동물의 먹이라하여 먹지 않는다. 거의 집집마다 도토리나무 한 그루씩은 있으며 오르내리는 다람쥐들도 많다. 이곳 사람들은 도토리를 주어가는 한국 할머니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좋아 하지 않는다. 거기에다 어떤 할머니들은 이른 새벽에 도토리를 줍는다고 남의 집 마당에 침입(?)하여 경우도 없이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일이 있어 주민들의 신고로 사직당국의 시비 거리가 되는 일들이 가끔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로 인해 한국사람 전체에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도 한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가고오며 도토리를 줍는 할머니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또 계절의 틈바구니 속에 이런 시기를 맞아 걱정이 앞서는 것은 올해도 새벽에 남의 집 뜰에 들어가서 도토리를 줍는 할머니들에게 도토리묵 같이 껌고 쓴 잔소리를 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내 책상에는 작은 꿩알만한 도토리로 눈, 코, 입을 검은 매직펜으로 코믹하게 그려진 만화가 고우영의 얼굴과 닮은 내 분신(?)이 놓여 있다. 깍정이가 벗겨지지 않은 도토리의 모양이 베레모를 쓴 내 꼴과 같다고 아내가 만들어 놓고 놀린다.


이경주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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