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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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5계절

2011-08-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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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8월15일은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된 지 66년째 되는 광복절이다. 당시 군중들의 감격과 환호와 흥분된 외침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1945년 우리 가족은 미군의 B29 포격을 피해 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종전을 기다리던 아버님이 빨리 우리를 데리러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강원도 산골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즐겁게 놀았던 일도 생각난다.

그러나 올해 8.15는 어수선하고 당혹스럽다. 기후변화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홍수와 가뭄과 폭풍우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일본 쓰나미와 원전사고와 미국의 신용강등과 주식 폭락과 경제공황의 염려 등 디지털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21세기는 카오스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8월15일은 내 생일이기도 하여 나는 광복절 아침식탁에서 미역국을 먹으며 한 살씩 더 먹곤 하는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괴테의 시구를, 삶의 굴곡을 이해하고 직접 경험한 것만이 정신의 영역에 스며들어 삶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내 정신도 깨어있길 바래왔다.

미국에 온 후 아침마다 일정시간에 일어나서 시간에 쫓기며 마음엔 장막을 내리고 얼굴은 가면으로 치장하고 끈기와 의무라는 수레바퀴에 무거운 짐을 싣고 등 뒤에 걸린 시계의 초침을 카운트하는 매일을 잘도 견디어 왔다. 세상을 무심이라는 단어로 바라보면 아픔도 안타까움도 지나는 바람 같은 것, 그렇게 모든 욕망과 계획을 은퇴 후로 미루고 있었다. 목마름에 허덕이듯 시간의 급류에 파묻혀 시간의 자유라는 단어를 꿈꾸었다.

은퇴 후 오랫동안 고여 있던 봇물이 갑자기 터지듯 그렇게 시간의 물보라가 내게 쏟아졌다. 그 동안 나는 아이들에 대한 짝사랑의 달인이 되어 미래에 대한 상상과 꿈을 꾸며 시간의 흐름을 건너왔다. 매일이 인내의 연속이었는데, 이제 매일 나를 위해서 새벽에 태양은 건너 편 산마루에서 떠오르고 저녁엔 붉고 장엄하게 내일을 약속하며 서산으로 지곤 한다. 그리고 지금 2년 동안 은퇴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은퇴를 가능성의 집약으로, 제 5 계절로 기대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꿈꾸고 노력하는 가득 찬 매일이 은퇴의 의미인 것 같다.

오늘의 시간이 온통 타의가 아닌 자의에서 돌아가니 보이지 않던 것이 느껴지고 만화경 속의 화려한 색과 입체감이 일상생활에서 살아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햇빛이 직광으로 내리쬐는 긴장 속의 고요함, 조곤조곤 지나가는 새들의 발자국 소리, 바람이 곡선을 타고 흘러가는 무심함, 꽃들이 봉우리를 터트리는 자연의 섭리가 마음의 길목을 노크하고 있다.

어깨 너머로 접어두었던 소소한 것들이 이제 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삶의 여울진 주름살이 모두 삶의 과정이라는 것, 그래서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느낌, 그렇게 낮과 밤의 빛과 어둠의 변화가, 그 그늘의 편안함이 보이게 되었다.

토막 난 지식들이 불티처럼 날라 다니는 디지털 시대의 지구촌에서 떼제베를 타고 자신의 생각을 지키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 곧 정신의 해방이라고 이제 나는 생각한다. 해방은 국가의 독립만이 아닌, 정신적 창조와 자유와 꿈의 동의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김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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