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간의 자격

2011-08-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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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이란 한국 TV 프로가 인기다. 훌륭한 남자가 갖춰야할 자격을 말하는 줄 알고 보았다. 그런데 구성이 좀 다르다. 남자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모아 인기 연예인들이 함께 체험하는 프로로 꾸며졌다. 일종의 한국식 ‘버켓 리스트’인 셈이다.

이제는 ‘남격’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전 국민적 예능 프로의 최근 하이라이트는 합창무대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여자 혼혈 지휘자아래 수개월간 뼈를 깎는 고난도 연습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그리고 전국 합창경연무대에서 프로보다 멋진 합창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나도 70여명 되는 합창단을 7년 간 이끌어보아 그 연습과정의 어려움을 잘 안다. 지금 생각하면 창설동기가 ‘인간의 자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합창에 남다른 애착, 추진력 넘치는 리더십과 함께 희생적인 심성을 지녔던 그는 이민 와서 중장년의 고비를 넘어가는 우리 한인 1세 들이 죽기 전에 꼭 함께 해야 할 가치 있는 일로 합창을 꼽았다.


그 세월 동안 우리 평범한 이민자들은 고난도의 성가와 명곡들을 마음껏 배우고 부를 수 있어서 행복했고, 이웃들이 뜨거운 가슴을 열고 들어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7년여 동안 홈리스 센터 같은 불우이웃들과 선교지에 30여만달러나 기부하는 분에 넘치는 자선사업도 했다.

모든 일이 때가 있고, 인재가 있어야하는 게 틀림없다. 김종대 형이 떠나고
난 뒤 나도 후진으로 물러섰다. 후배들이 물려받은 합창단은 오랫동안 휴면중이다. 우리 인생사가 TV프로처럼 멋진 한판 승부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져야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내가 ‘남자의 자격’에 미달이란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터이다. 우선 남편으로서의 자격에 의심이 들기 시작된 게 돈 버는 능력 때문이었다. 사실 자격(資格)의 자(資)자도 조개 패(貝)가 달려 재력을 뜻하지 않는가. 아들 자격도 미달이다. 이십여 년 전, LA에서 자리 잡는 동생가족들의 애기들을 보겠다고 내려가신 어머니가 이젠 팔순이 넘으셨는데 아직도 못 모시고 있다. 아버지로서의 자격도 그렇다. 이젠 제힘으로 다 커 버린 자식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언제 부터인가 내가 살아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년 내 은퇴를 앞둔 탓이기도 하다. 어쩌면 온당한 ‘남자의 자격’에 승부 한번 걸고 싶은 잠재의식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이모작을 생각했다.

한의 대학원에 등록한지 2년차가 되었다. 풀타임 직장 일을 하면서 학업을 하자니 힘에 부친다. 그러나 은퇴를 하면 의료 선교 팀이나 ‘국경 없는 엔지니어팀’과 함께 어려운 세상에 나갈 꿈을 꾼다. 낮엔 우물을 파주고, 밤엔 침을 놓아주면서 사는 삶의 그림을 그린다. 내 스스로에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고 싶은 염원인지도 모른다.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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