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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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2011-07-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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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잊은 지 오래였던 이문세가 어느 날 북가주에 나타나 ‘광화문 연가’를 불렀다. 근 20년만이다. 그의 노래를 들으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옛날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노래란 옛 추억을 한순간에 눈앞에 불러오는 타임머신의 위력을 가졌나보다. 어쩌면 노랫말 한소절로 수십 년 돌덩이처럼 굳어진 마음이 눈 녹듯 녹아버리는지 모르겠다.


광화문 연가를 들으며 20대에 처음 보았던 아내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광화문은 내 젊음의 텃밭이었다. 지금은 수십 차선 드넓은 아스팔트 광장으로 변했지만, 그때 효자동행 전차를 타고 학교를 오르내릴 때만해도 광화문 네거리의 은행나무들은 푸르고 싱그러웠다. 화창한 토요일 방과 후, 친구들과 경복궁 담을 끼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은 멋진 세상으로 뚫린 환한 중앙통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뼈대가 자랐다. 훗날 경실련을 창설해 시민운동을 주도한 S형이 대학부 리더였는데 우리는 모임이 끝나면 광화문 뒷골목의 다방과 막걸리 집을 전전하며 끝없이 떠들고 고뇌했다.

그와는 공대 기숙사 룸메이트이기도 했는데 기계과 수석으로 들어간 수재가 기독학생 운동가로 변신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매일 혼동하고 흠모했었다.

아내를 만난 것도 광화문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미팅을 여왕봉 다방에서 미대생들과 했었다. 아르바이트에 바빴던 나는 표를 사놓고 못가는 친구가 준 티켓을 들고 마실 가듯 나갔다. 무슨 인연인지 아내도 남의 표를 들고 왔다. 선인장이 그려진 3번 티켓. 그날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나는 이 인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열변했다. 아내는 조용히 웃으며 들어주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예배당../”

그때 아내는 부모님들과 함께 나가는 남산 밑 조그만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했었는데 나는 친구 패를 데리고 매 수요일 저녁예배 때마다 출근했었다. 유복하고 착실하게 자란 아내는 나 같은 떠돌이가 나다니는 큰 세상을 동경했고, 대학 때부터 기숙사로 전전하던 나는 작고 아늑한 남산 밑 교회당 같은 가정을 꿈꾸었다.

우리는 결혼하고 미국 유학을 오면서 광화문에 우리들의 젊음을 고스란히 놓고 왔다. 그리고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믿고 살았다.


우디 앨렌이 만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스’를 보았다. 한 젊은 작가가 꿈을 찾아 파리에 왔다. 그는 자정 마다 성당 앞을 지나는 자동차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다. 20년대 파리에서 젊음을 보냈던 헤밍웨이, 피카소, 장 콕토들과 교우한다. 감격한 그는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우상들도 역시 자기 세대에 만족치 못하고 더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알게 된다. 어느 세대건 공허한 옛 꿈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걸 깨달은 젊은이는 더 이상 옛날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의 꿈을 찾기로 결심한다.

내게도 세월 따라 떠난 줄 알았던 옛날이 노래 한마디에 실려 다시 돌아오고 있다. 옛 광화문의 추억 때문에 오늘과 내일이 더욱 소중하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이곳에서 한평생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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