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행복의 문

2011-07-1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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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전 수필가, MD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牛)치는 아해...”이라는 고시조(古時調)가 생각나는 7월의 이른 아침,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낙비 내리기 전 특유의 찜통 속 같은 더위, 냉방장치로 감당하기 힘든 복사열을 신선한 새벽공기로 바꾸기 위해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사뿐 소리가 나더니 부리가 약간 만곡(彎曲)된 새 한 마리, 문턱을 넘어 들어오다가 장승처럼 서 있는 나를 보고 잽싸게 몸을 돌려 낮게 날아간다. 새도 근시가 있음인지 나를 성문 앞 보리수쯤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착각은 자유의지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왜 새처럼 가볍게 살지 못하는가. 왜 체면유지라는 무거운 가면(假面)을 새털처럼 가볍게 날려 보내지 못하는 걸까. 인생길에 실패란 단어는 없다. 일등도 꼴찌도 없다. 벌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사회구조상의 통념이기에 모두가 나름대로 능력껏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얼마만큼 벌어야 만족한 삶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욕심 특히 물욕(物慾)과 명예욕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참으로 좋은 지리적 위치에 살고 있고 시대적 혜택도 많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사건 등 일련의 가슴 아픈 일들. 초특급 마술사라 할지라도 빠져 나가기 힘들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망(網) 속에서 자존심과 체면유지의 갈등 속에서 본인 나름대로 부지기수의 이유가 있겠지만 귀중한 생명을 버려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가족들, 부모의 가슴에 죽을 때까지 뺄 수 없는 대못을 박아 허무 속에서 황혼 길을 헤매게 하고, 살아온 세월 동안 눈물겨운 노력으로 성취했을 결실을 수포로 돌리고, 사회봉사로 여생을 뜻있게 펼쳐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을 수장시키고 사세(辭世)의 인사를 하고만 안타까움.
세월은 흐르고 물도 흘러 옛 물이 아니듯이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임을 자랑하던 시대는 과거가 되었고, 다민족 다문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명문가 출신, 학벌, 족벌, 학연, 지연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다. 능력만 있으면 창업은 물론 재벌도 꿈이 아닌 현실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좋은 시대에 많은 혜택을 받고 살면서 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왜 마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기에, 나약한 사람이기에 자신의 과오를 선뜻 인정하지 않으려는 옹졸함, 체면유지라는 무거운 가면을 저 멀리 수해(樹海) 속 낡은 늪 속으로 던져 버리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는 행복에 대한 저의(底意)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식견이 있기에, 행복은 하늘만큼 땅 만큼 도도히 흐르는 벽해(碧海)의 물처럼 억겁으로 넘쳐난다.
여름밤 난무하는 반딧불처럼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널려 있는 행복, 갖는 사람이 주인이다. 누가 값을 지불하라 하지도 않고, 많이 가졌다고 도적이 넘실거리지도 않고 번거롭게 땅 파서 묻을 수고도 필요 없고 감당하기 힘들 천문학적 수치의 비자금을 어느 나라에 감출까 잔머리 굴릴 필요도 없다.
억울하게 생명을 끊지 말아야 한다. 재물이란 이용해야 가치가 있는 것. 앞산에 진달래 뒷산에 뻐꾸기가 아니라 앞뜰에 코스모스 한들한들, 뒤뜰에 자귀꽃 만발, 황나비 범나비 나래 쉬고, 그 나무그늘 돌 위에 앉아 호미든 손 내리고 땀을 식힌다. 수목(樹木) 속 높은 가지에 앉은 새들의 합창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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