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이민의 뿌리와 싹

2011-06-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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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80년대 동부지역의 대학촌에서는 방학 때마다 뉴욕으로 가는 유학생들이 있었다. 관광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유학생들은 가난했고, 대학촌에는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뉴욕의 청과상은 두세 달 일하면 다음 학기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일자리였다. 한국에서 대개 고생 모르고 자란 유학생들이 청과상에서 하루 10여 시간씩 땀에 절어 일하고 돌아오면, 새 학기 대학촌에서는 그 중노동 자체가 무용담이 되곤 했다.

한인이민 1세의 전형과도 같았던 뉴욕의 한인 청과상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1970년대부터 거리 모퉁이마다 생겨나기 시작한 한인청과상은 지난 수십년 옐로 캡이나 프레츨 노점처럼 뉴욕의 중요한 거리풍경이 되었다.


청과상으로 대표되는 한인이민은 억척의 상징이었다. 주 7일, 새벽부터 밤중까지, 때로는 하루 24시간 가게 문을 열고, 온 가족이 들러붙어 야채, 과일을 나르고 다듬고 진열하며 도무지 쉴 줄 모르는 악바리 이민자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언어장벽에 특별한 기술 없는 초기 이민자로서는 당시 그만한 업종이 없었다. 1980년대, 5,000달러 정도에 가게를 마련하고 열심히 일하면 몇 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유태계에서 이탈리아계로 이어오던 가게들을 속속 한인들이 사들여 80년대 뉴욕, 뉴저지 일대의 한인청과업소는 3,000여개에 달했다.

그 많던 한인청과상이 2005년이 되자 2,000개 정도로 줄고, 지금 뉴욕시에는 1,500개 미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민 연륜에 따른 자연스런 변화이자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 탓이다. 우선 렌트비가 뛰고, 시당국의 규제가 심해진데다 대형체인들이 들어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즈니스가 전 같지 않게 되었다.

아울러 한인들이 이제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것이 내적 요인이 되었다. 자리 잡힌 1세들은 노동 강도가 덜한 네일살롱이나 세탁소로 업종을 바꾸고, 2세들은 화이트칼라 직종으로 진출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변화가 뉴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전국의 한인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뉴욕에 청과상이 있다면 LA에는 자바시장이 있다. 청과를 포함한 뉴욕의 식품업소 중 70%를 한인이 소유하고 있듯이 LA에서는 자바시장의 70% 정도가 한인업소들이다.

이들 모두가 1세다운 헝그리 정신으로 몸 돌보지 않고 일한 땀의 결정체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있다. 오랜 세월 남가주 한인상권의 젖줄이던 자바가 불경기 직격탄을 맞고 부동산 시장이 흔들리면서 한인경제는 어려움에 빠져 있다. 툭하면 파산에 계 파동, 야반도주가 비일비재하다.


70년대 이민물결 이후 한인이민 40년, 우리의 현주소를 짚어볼 때가 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인이민의 뿌리인 1세는 어디에 있고, 거기서 자라난 싹인 2세는 어디에 있는가. 우선 1세들이 부를 일궜던 노동집약적 비즈니스들은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 경기는 나쁜 데 렌트비는 치솟고 경쟁은 심해지고 있다. 한 금융전문가의 말이다.

“1990년대 초에는 부부가 리커 스토어 시작해서 열심히 하면 집 사고 아이들 교육 시키면서 먹고 살 만했어요. 지금은 50만 달러짜리 비즈니스 사서 부부가 매달려도 수입이 넉넉하지 못해요.”

게다가 갓 이민온 동남아계 이민자들이 원 베드룸에서 여럿이 살면서 죽기 살기로 일을 하는 데는 한인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난 40년 한인상권을 키운 뿌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뿌리로 키워낸 싹인 2세들은 어떤가. 부모들의 희생과 교육열 덕분에 성공한 2세들이 많은 것은 한인사회의 자랑이다. 하지만 너무 ‘명문’에 환호하는 우리의 풍토가 후유증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헛바람이 들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BBK 파동의 에리카 김 남매가 대표적인 예이다.

한인이민은 이제 2세 시대이다. 청과상, 마켓, 리커 스토어 등 자영업은 1세들의 은퇴와 함께 추억의 챕터로 물러날 것이다. 2세 시대가 어떻게 하면 튼실하게 정착할 수 있을까. 유태계, 일본계 등 이민 선배 커뮤니티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연구할 때가 되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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