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빚

2011-05-2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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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출생부터 어머니의 산고의 빚은 물론 산파나 의사의 도움으로 삶이 시작된다. 그 빚의 대상은 생존의 필수조건을 제공하는 자연을 비롯해 사회와 국가, 이웃과 친구, 그리고 친지와 가족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매일의 삶속에서 보고, 만지고, 먹고 마시며, 누리는 모든 것은 빚의 소산이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연 이 당면한 사실을 얼마나 의식하고 매일 삶속에서 반영하며 살아가는지는, 그래서 그 삶이 조금은 겸손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굴곡이 제법 심한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면 나는 여러 사람에게 유난히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다. 빈 털털이로 결혼해 아내의 내조로 수년간 대학원을 다녔으니 아내에게 진 빚도 만만치 않다. 또한 그 당시에는 영주권만 있어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때라, 등록금 면제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보조해준 학교에도 큰 빚을 지었다.


나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여섯 번째로 태어났는데, 맨 위의 형님 다음에 연달아 네 명의 딸이 태어난 후 출생했다. 그때만 해도 이유 없이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이라 오랜만에 태어난 아들은 특별대우를 받았고, 누나들의 사랑 가운데 참 버릇없고 염치없는 아이로 자랐다. 동생을 무던히 사랑한 누님들은 나의 철없고 무리한 요구를 잘도 들어주었고, 우리 가정 형편으로는 어림없는 것들도 떼를 써서 꼭 가져야만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는 동안 그 어둡고 무겁고 황량했던 시절에 가까운 친구들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마다 약속이나 한 듯 가슴 한편에 쓰라린 아픔이 있던 친구들이어서였는지 서로를 더욱 아끼고 껴안았다.

누님들 출가 후 어머니의 병환이 중하여 도시락도 못 싸갈 때 내 몫까지 두개의 도시락을 학교에 싸온 친구, 자주 닥치는 제사 때나 잔치 때면 그 차린 음식을 먹게 하려고 꼭 나를 불러간 친구, 그리고 등록금이 없어 쩔쩔맬 때 돈을 모아서 등록금을 해결해 준 친구들도 있다.

올해는 대학 졸업 40주년 기념 동창 모임이 있어 고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여러 사정으로 방문을 망설이던 중 나의 참석을 간절히 원하는 가까운 친구가 우리 부부 비행기 표를 구입해 보내 주었다.

과거에 그 친구에게 약간의 호의를 베푼 적이 있다. 그는 늘 고마워하며 이미 여러 번에 걸쳐 감사의 표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또 그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말았다.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는데, 그 친구에게 이 빚을 갚기는 힘들 것 같고 남에게라도 조금씩 갚는 삶이 되면 좋겠다. 바울의 말처럼 ‘사랑의 빚’은 ‘피차’ 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찬효
FDA 약품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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