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
2011-04-28 (목) 12:00:00
내가 그리고 있는 기린은
네가 그리고 있는 기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엉터리 기린 그림이라고
너는 말하지만 그래 나는 기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렸다
너의 기린이 점점 형체를 갖추면서
나무의 잎사귀와 열매를 따먹으며
너의 붓끝에 사로잡히는 동안에도
나의 기린은 점점 자라 화폭을 뚫고
이젤을 넘어뜨리곤 시멘트 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구광본(1965 - ) ‘기린’ 전문
기린 그림을 그리지 않고 기린을 그렸다는 화자의 말에는 새겨들을만한 시인의 창작론이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표현하고 있는 기린(삶, 혹은 진실)은 어쩌면 기린의 본질이 아니라 기린이 어떻게 생겨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관념을 그린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세잔느가 그린, 엉터리 같고 맛없게 생긴 사과가 입체파와 모든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 하는 미술사가들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동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