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무릎

2011-04-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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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무릎수술을 하셨다. 미수란 쌀 미(米)의 파자(破字), 팔팔(八八)로 여든여덟 세이시지만, 늘 젊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완쾌를 비는 카드에 아름다울 미를 넣어 미수(美壽)로 써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아니다. 난 계속 팔팔하게 살란다. 본래 미수가 낫다” 하며 애써 웃으신다.

그러나 웃으시는 얼굴이 수척하시다. 노구에 양쪽 무릎뼈를 깎아내고 인공관절을 심었으니 후유증이 심하다. 수술 후 달포가 지났지만 입맛을 잃고 적혈구를 만들지 못해 계속 수혈을 받으신다. 주사바늘이 꽂힌 손목이 앙상하다.

당신의 손목과 무릎이 닳고 피가 마르도록 우리 4남매를 키우신 셈이다.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루씨고녀를 마치던 해, 청운의 꿈을 안고 혈혈단신 서울 유학을 오셨다. 이화 영문과 졸업반 때 6.25사변이 터져 평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셨지만 이를 악물고 가정을 꾸려가셨다. 겉으론 함경도 또순이 억척처럼 보였어도 혼자계실 땐 부모 형제가 그리워 자주 눈물 흘리시곤 하셨다.


“나는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올 초에 돌아가신 한국 문단의 어머니, 박완서 소설가의 고백을 읽고 나는 어머니의 삶을 생각했다. 그녀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한 스무 살 나던 해, 동란을 맞았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의 가족은 빨갱이로도 몰리고 의용군으로 나간 오빠가 세상을 뜨는 등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녀는 6.25 전쟁의 참혹했던 경험. 그 상처를 복수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내 어머니도 6.25란 트라우마를 남다른 가족 사랑으로 치유 받고 극복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 오셔서 손주들 넷 모두 손수 먹이고 키우셨다. 이젠 모두 어엿한 대학생, 전문인들로 성장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머니에게 새로운 가족 사랑의 기회가 온 것이다.

몇 해 전에 결혼한 내 큰 아들 가정에 첫 아기가 생겼다. 어머니에겐 첫 증손자인 셈이다. 곧 해산 예정이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들가족은 뉴욕으로 전문의 펠로십 과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최근 무릎관절염이 악화돼 거동이 불편해지자 과감히 수술을 결단하셨다. “내 첫 증손자가 날 때 내가 업어줄란다. 업어 재우고 키우려면 무릎이 성해야지” 식구들이 후유증 염려 때문에 말렸는데도 끝내 수술대에 오르셨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가족 실태조사가 있었다. 친부모를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사람이 불과 78%에 그쳤다고 한다. 5년 전엔 93%였다니 급격한 감소추세다. 많은 자식들이 제 에비, 에미를 더 이상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친부모를 봉양해야 할 짐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간다는 말이다. 제 가족만 편하겠다고 늙은 에미의 피 마르고 닳은 무릎을 외면하는 세태가 되었다. 고백컨데 내 유년의 기억의 원점은 “엄마의 무릎”이었다. 그 무릎을 베고 자라면서 아픈 배를 낫고, 풍기는 젖내음에서 가족 사랑을 배웠다. 내 “엄마의 무릎”이 내 첫 손자, 당신의 첫 증손자의 행복한 첫 놀이터가 되길 원한다. 하루빨리 “엄마의 무릎”이 팔팔하게 나으시길 기도드린다.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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