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재(秋材). 대지 위에 낙엽을 다 떨어트리고 난 늦가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만들어낸 겨울나무의 나이테를 말한다. 나이테 중에서 늦게 형성되므로 만재(晩材)라고도 한다. 추재의 성질은 환경에 좋은 여름에 만들어진 춘재(春材)보다 색같이 짙고 비중이 크고 강철같이 단단하다. 나이테 중에서 추재가 차지하는 비율을 추재율(秋材率)이라고 하고, 특히 침엽수나 향나무에 있어서는 추재율이 클수록 재질은 단단하다. 춘재나 추재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형성된다. 부드러운 춘재가 만들어지는 배경에는 언제나 넉넉함이 있다. 봄과 여름이 주는 충분한 물과 햇빛은 나이테의 세포를 부드럽고 희게 만들어 줌으로 재질이 무르고 힘이 없다.
반면에 단단한 추재가 만들어지는 배경에는 언제나 결핍과 고난이 있다. 가을과 겨울에는 수분과 햇빛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천천히 나이테가 만들어지면서 그 색깔은 짙은 고리 모양이 되고, 강철같이 단단한 재질이 형성된다. 사람이 겪는 인생도 나무와 비슷하다. 인생이 겪는 삶의 여정에 따라 춘재의 나이테가 형성되기도 하고 추재의 타이테가 형성되기도 한다. 또 계절의 변화를 삶의 여정을 빗대어 삶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한다. 지금은 고난주간이고 이번 주일은 부활주일이다. 나무의 삶으로 말하자면 막 춘재의 시기를 끝내고 추재의 시기로 접어드는 경계선에 있다.
꼭 이맘때가 되면 세상이 온통 연두색으로 가득하다. 산천초목이 온통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나무 가지가지마다 수액의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나무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으로 분주하다. 신비롭다. 추운 겨울 내내 잠들어 있던 나무들이 부활의 절기가 되면 새로운 체관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 생명의 수액으로 가득히 채워, 나무를 다시 살려 낸다. 어떻게 생태계는 이 부활의 때를 잊지 않고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다. 그 외에는 답이 없다. 기독교 신앙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한 작은 나무의 나이테가 보여주는 춘재와 추재의 구분이라든지, 자연과 계절의 봄마다 맞이하는 부활의 새 생명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만들어 진 추재의 나이테를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연관성을 배운다. 인생의 고통을 견뎌내는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게 된다는 희망의 약속을 배우는 것이다. 또 추재의 나이테를 통하여 침묵과 기다림의 지혜를 배운다. 고난과 시련의 추운 겨울을 겪는 나무는 묵묵히 그 어려움을 견뎌내고 기다릴 줄 안다. 왜 그런가. 묵묵히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찬란한 부활의 봄이 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것들이 사람보다 더 낫다.”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특
히 얼마 전에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학생, 교수의 연쇄 자살사건을 바라보면서 더 이런 상념에 젖어든다. 만일 그들이 부활의 봄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 생태계를 통하여 주어지는 찬란한 부활의 선물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듯이 신앙의 부활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먼저 십자가의 험한 고난과 상처와 죽음 같은 어두움의 터널이 있었다. 그 고난의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자 만이, 찬란한 부활의 봄을 맞이할 수 있고,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그전보다 더 단단한 추재의 자신을 세울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부활의 신비를 아는 자와 그것을 모르는 자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이 부활을 사모하고 영생을 꿈꾸는 것은 그것들이 본래 그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것들을 상실했기에 그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것들에 열망은 그의 마음속에 깊숙이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부활과 영생을 아는 인간은 세상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하다.” 자연도 알고 있는 부활의 신비를 사람이 모른다면 그것보다 비참한 것은 없다고 외치는 것이 바로 파스칼의 논의다. 당신은 리더인가. 부활의 확신으로 탁월한 추재의 삶을 살라.
온누리 순복음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