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음 주자를 기다리며

2011-03-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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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달려갔다. 8시간 이상 트럭을 운전해야 하는 힘든 길이었지만 그 피로를 잊을 무렵이면 또 달려가게 되었다.

LA에선 잃어버린 지 오래되는 밤하늘의 은하수와 정적 속에 광활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무수한 별빛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밤바다의 거대함 앞에서 매번 내 자신의 미미함에 머리 숙였던 곳이다.

지난 10여년 내가 의료봉사를 계속해온 멕시코 바하지역은 또 허허벌판의 황토 흙냄새, 바닷가의 비린내, 가난하나 순수한 주민들의 땀냄새 속에서 내게 한없는 평안을 느끼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보낸 한 순간 한순간이 한없이 평화롭고 더없이 보람찬 경험이긴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그곳에서 환자를 진찰하는 일보다 힘든 것은 이 여정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동행이 있을 때는 그래도 나았지만 피치 못해 혼자가야 했을 때도 여러 번이었다.

때로 지치고 피곤하지만 혼자도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혼자 인적 없는 바닷가를 거니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건 번잡한 일상에서 오래 잊고 있었던 내 자신과 만나는 일이었다. 나 자신과 만나며 나를 버티게 하는 중심이 무엇인지 알고 나 자신과 교류할 수 있을 때 타인과도 참된 교류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는 사색의 정리를 위해, 음악가는 작곡을 위해, 예술가는 창조를 위해, 성자는 기도를 위해 홀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보통사람인 내게도 이런 순간들은 내 삶을 되돌아본, 내 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남겨졌다.

작은 클리닉을 가진 내과의사로서는 갖기 힘든 경험이었다.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아준다고 해서 휴머니즘 혹은 자선, 이런 거창한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보다는 갈 때마다 밀려오는 벅찬 감정들에 끌려 그곳을 다시 찾곤 했었다.

내게도 흰머리가 눈에 뜨이게 늘어났다. 체력의 한계를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작은 봉사이지만 힘이 달린다. 피로와 책임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이런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봉사의 다음 주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간 장만된 많은 장비들도 다음 봉사자에게 전해주고 싶다. 트럭, 캠퍼, 트레일러, 창고, 그리고 다양한 기구들…이 많은 물품들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여러 후원자들의 정성어린 성원으로 마련된 것이다. 봉사를 원하는 누구에게라도 모두 되돌려 주어야 한다.

밤이 지나면 또 다른 밝은 아침이 오듯이 힘차게 봉사의 여정을 시작할 다음 주자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난 오늘도 머리 숙여 기도하며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최청원
내과의사·바하힐링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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