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샌드위치 세대 사람들

2011-02-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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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케가 2011년 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하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정돈하고 남편과 둘이서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작은 콘도로 이사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나하고는 세 살 차이 밖에 안 되는 손아래 올케이지만 오빠 없이 평생을 살고 있는 내게는 손위의 올케로 착각하며 지낼 때가 많다. 그만큼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의지하며 가슴속에 품고 지내고 있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나를 끌어당기는 큰 이유일 것이다.

올케는 무척 현명한 여자이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사회에서 성장하였더라면 뛰어난 인재로 발전했을 거라며 나는 올케를 놀리곤 한다. 올케가 내 남동생에게 시집을 온지 벌써 40년이 훨씬 넘었다. 나의 친정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결혼하자 호강은커녕 올케는 호된 시집살이를 치렀다.


동생 내외는 큰 결단을 내리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제2의 인생을 개척코자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 이민 길에 나섰던 것이었다. 1970년 초였으니 한국계 이민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고통의 멍에를 짊어진 눈물겨운 이민생활이 동생 내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숱한 고생에 쓰라린 경멸과 분노에 밀리며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은 그래도 견딜만 했단다.

제일 웬수가 그놈의 언어 장애였으니 영어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루 이틀에 해결을 볼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열일을 제쳐놓고 영어 공부부터 해결을 보는 일이 우선순위임을 알면서도 하루하루의 생활이 큰 위협이었기에 별 도리가 없었던 일을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프단다. 이렇게 세월은 흘러 동생 내외는 이제 실버 커플이 되었다.

두 아들들은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 장성하여 사회의 건실한 요원으로 활약을 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팔자 좋은 노부부는 아들이 장만해준 큰 주택에서 부족한 것 별로 없는 여유 있는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형님, 이런 것들 아무 소용없어요. 큰집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어요. 부담스럽기만 하지요. 실용적인 자그마한 콘도로 옮겨서 여생을 뜻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금년에는 이사를 결심하고 정초부터 서두르기로 했단다.

올케와 나는 소녀기, 청춘기를 거쳐 미국에서의 장년기를 비슷한 세대에서 보냈다. 올케와 나는 둘이 다 시어머니까지 평생을 모셨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올케와 나는 각별히 서로 이해하고 통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샌드위치 세대 친구들’이라고 서로를 위안하곤 한다. 우리 샌드위치 세대들도 이제 칠십을 훨씬 넘고 보니, 어느새 부모님 시부모님들께서는 다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남편들은 인생의 턱걸이에 매달려 있는 세월에 접어든 삶을 살고 있다.

미국 이민 후 시작한 자영업을 접은 뒤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올케는 직업 생활시절이나 다름없이 부지런하고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웃 시니어 센터에서 열심히 컴퓨터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올케를 얼마나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있는지 본인은 모를 것이다.


이동우

전 워싱턴정신대문제
대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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