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월의 마음

2011-02-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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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 보아라/ 항상 비어있는 그 자리에/ 어느 덧 벙글고 있는 꽃…”

오세영 시인의 ‘2월’이란 시를 읽다가 아니 벌써 2월인가 하고 화들짝 놀란다.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의 속도감에 주눅이 들어 마지못해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이 나이가 되어도 늘 지각하는 아이처럼 허겁지겁 세월에 쫓겨 달려가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오늘은 시인의 권유를 듣기로 한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레 텅 비었을 것이라고 버려두었던 내 삶의 뜰로 나서기로 한다. 그곳에서 어느 새 벙글고 있는 매화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꽃에게 어떻게 세월과 벗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한다.


마음을 추스리니 문득 “잃어버린 조각”이란 실버스타인의 동화가 생각난다.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그 잃어버린 귀퉁이를 찾아 동그라미는 길을 나섰다. 내 잃어버린 조각은 어디 있나요? 눈과 비를 헤치며 헤맸지만 조각이 떨어져 빨리 구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구르다가 멈춰 서서 벌레와 대화도 나누고, 길가에 핀 꽃냄새를 맡기도 했다.

오랜 여정 끝에 몸에 꼭 맞는 조각을 만났다. 이젠 완벽한 동그라미가 되었다. 예전 보다 몇 배 더 빠르고 쉽게 구를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구르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꽃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풍뎅이도 잠자리도 지나쳤다. 어느 날 동그라미는 구르기를 멈추었다. 찾았던 조각을 살짝 내려놓았다. 그리고 귀퉁이 없이 천천히 굴러가며 노래했다. “내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지요”. 나비 한마리가 동그라미의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그래.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좀 늦게 가면 어떤가. 좀 뒤쳐져도 우리들 삶의 방향만 바로 서 있다면 언젠가는 목표에 다다르는 게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마당에 매화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아직 새순이 돋지 않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가지의 방향이 옳으므로 어느 날 벙긋 웃음을 머금고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겐 왜 그 믿음이 없는가? 어딜 향해 허겁지겁 쫓아가는가? “한국인은 자신을 다른 사회구성원과 끊임없이 비교해 남을 이기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생각한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남을 이기려면 한 발짝이라도 빨리 달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유전자속에도 박혀 있는 것 같다.

작년 말 몇 해 후면 다가올 은퇴를 앞두고 야간 대학원에 등록을 했다. 선교여행도 하고 이웃도 돌보는 봉사의 삶으로 방향을 잡아놓고 인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사오년 느긋하게 즐기며 공부하려는 초심이 사라져간다. 서둘러 마치려는 욕심에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고 깜짝 놀란다.

속도라는 가시적인 현상에 삶의 방향의 본질을 잃어가는 내 마음을 시인은 어쩌면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시의 결구를 음미한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김희봉
환경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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