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로운 일상

2011-02-07 (월)
크게 작게
“나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폴리네시아로 가서 영원히 살기로. 그렇게 하면 내일의 일,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 바보 같은 싸움을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화가 폴 고갱이 했다는 말이다. 고갱은 그렇게 폴리네시아로 떠난 후 우리가 떠올리는 지금의 고갱이 되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가 그토록 간절히 떠나고자 몸부림쳤던 곳은 많은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이랄 만한 유럽이었으며, 그가 폴리네시아로 떠나기 전 자신의 소유물을 처분하려고 머무르던 곳은 바로 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기 위해 몰려드는 그 도시에서, 고갱은 짐을 싸 탈출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제 막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려는 이 아침에 문득 생각난 폴 고갱의 편지. 그의 편지 속 이 구절로 ‘일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 단어의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라는 사전적인 의미가 주는 첫 번째 감상은 ‘권태로움’이다. 더 이상 어떠한 생각이나 고민이 필요 없는 자동적인 반복은 편안함과 동시에 지루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바로 그 뒤를 잇는 감상은 ‘기회’이다. 날마다 반복된다는 것은 어제 망쳤다 해도 오늘 다시 만회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기회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반대로 어제 잘했다고 해서 오늘도 잘하리란 보장 또한 없으니, 참 아이러닉하게도 이 일상이라는 단어는 새로움을 가리키기도 하는 셈이다.


고갱은 필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이끌림에 의해 이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이 선택한 폴리네시아라는 변화된 상황에서도 그가 겪어야 했던 것은 그 나름의 ‘일상’이었을 것이고, 폴리네시아에서의 일상에서 새로움을 느꼈을 고갱이라면 유럽에서의 삶에서도 새로움을 찾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배경묘사가 너무 아름답거나 혹은 지극히 사실적인 문학작품을 대할 때면 언젠가 꼭 한번 그곳에 가보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그랬다. 흐뭇한 달빛아래 숨 막힐 듯 가득한 메밀꽃밭의 묘사를 읽으면서 꼭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가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이렇게 줄곧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혹시 일상이라는 것이 주는 유익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언제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결국 거대한 자연의 한결같은 일상의 반복에 뿌리내리고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집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른다. 불과 몇 주 전에 잎이 다 져버려 쓸쓸하다 했던 나뭇가지에서 새순들이 돋는 것을 보았고, 길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게 솟아나기 시작한 여린 빛의 들풀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흐뭇했다.

물리적인 움직임 없는 산에서 이런 새로움과 변화와 생명을 만나는 것은 자체가 경이로움이고 기쁨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주어진 일상을 새로이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다짐보다는 고갱처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들 때 더욱 그렇다.

날마다 유사하게 반복되는 환경 가운데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을 가끔씩 잊은 채 지루함만을 탓하곤 한다. 새로운 한해가 시작됐고, 새로운 학기와 또 하루가 시작됐다.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삶의 곳곳에서 새순이 돋아났다. 그것이 같다고 믿어왔던 일상에서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기대된다.


노유미 CSUN 대학원 재학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