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적금통장

2011-01-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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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생각

또 한바탕 겨울비가 쏟아지려나 보다. 산 아래 걸터앉은 시커먼 구름이 내 마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진다. 내일이면 따사로운 겨울 햇살 속에 숨어버릴 비구름들이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마치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새해 계획으로 희망에 찼던 2010년이 엊그제 같은 데 어느새 2011년 새해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아이들은 커간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사랑해야 할 꼭 한 사람인 엄마는 오늘도 빠듯한 삶 때문에 자꾸 순위가 뒤로 밀린다.

미국에 사는 내가 제일 한가할 시간에 맞추느라 엄마는 한국시간 새벽 서너시에 늘 일어나셔서 전화를 한다. 하지만 엄마의 그 값진 사랑 앞에서조차 나는 그 짧은 시간을 통째로 드리지 못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루 계획 세우기로 머릿속은 딴 생각이다.


아이를 낳고 이제 나도 엄마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엄마라고 다 같은 엄마가 아님을 안다. 가끔 한 밤중에 엄마를 생각하면 울컥 눈물이 날 정도로 엄마는 고생이 많으셨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엄마의 사랑은 언제나 넉넉했고 포근했으며, 나의 사랑은 언제나 이기적이었다. 지금부터 갚아도 다 못 갚을 엄마의 사랑 앞에서 나는 얼마 전 또 가슴이 저려왔다.

“경라야, 번호 좀 적어봐.”
“엄마, 무슨 번호?”

“만기된 네 적금 통장번호. 주민번호만 주면 보험회사에서 다 알아 해주겠지만, 그래도 상품이름이 뭔지, 통장번호는 뭔지 언제부터 얼마를 받는지…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그러면서 애써 웃으시며 “엄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이러다가 어느 날 휑하니 갈수도 있는데, 우리 막내딸 선물은 확실히 챙겨줘야지. 네가 55살 넘으면 받는 적금이야. 너 대학 들어갈 때부터 부은 건데, 시간 참 빠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순간 뜨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가, 차갑게 빠져나가는 싸구려 열정과는 다른 것이겠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 한결같음으로 안아주고, 바라보고, 주고 또 주어도 부족한 것임을 엄마의 사랑을 통해 안다.

내 나이 55세, 엄마 나이 83세. 엄마가 늘 함께 해주면 더없이 큰 축복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 받아들 적금이라면 매달 적금을 마주 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엄마가 그리울까. 엄마가 건네준 통장 번호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 사는 게 뭔지, 마음속으로는 늘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면서도 그 흔한 비타민 한 통 챙기지 못하는 못난 딸 용서하세요. 엄마 딸로 태어나 너무 감사하고, 엄마 사랑해요. 한 천년만 더 저랑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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