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행복한 ‘도구’

2010-12-31 (금)
크게 작게
지난 주, 크리스마스이브에 동네 어귀에 있는 아담한 미국교회를 찾았다. 멀리 떨어진 한인교회를 다니면서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언덕 위의 예배당이었다. 왠지 그날 밤은 특별 초대라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교회당엘 들어섰다. 훈훈한 온기가 가득했다. 마침 한해를 돌아보는 교인들의 간증시간이 있었다. 한 중년 신사가 나왔다.

“저는 피부과 의사입니다. 작년 성탄절 무렵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선물을 사러 노스트럼 백화점엘 갔습니다. 물건을 사고 신용카드를 냈는데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드에 문제가 있는지 결제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5층 고객서비스 창구로 가서 확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다른 카드를 낼까하다가 혹시 도용문제라면 해결해야할 것 같아 고객서비스로 갔습니다. 그곳에도 줄이 길었습니다. 바쁜 나는 어이없이 시간 낭비하는 데 속이 상해 막 나오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순간, 내 앞에 선 30대 후반쯤 된 여성의 뒷목덜미 부분에 검불그레한 작은 반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직업상 그 반점이 심상치 않음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는 의사의 사명감으로 그 여성에게 자기 명함 뒤에 잘 아는 피부암 전문의의 연락처를 적어주었다고 한다. 다행히 암 초기여서 그녀는 그 후 무사히 절제수술을 받고 완쾌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듬해 아프리카 선교를 준비하던 선교사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이 사건은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저는 우연이나 기적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화점에서의 일은 제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제 카드에 아무 이상이 없고 단순한 사무착오로 밝혀졌던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점점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그의 사역에 꼭 필요한 선교사를 지키시느라 저를 그 자리에 있게 하셨다는 확신이 듭니다.”

감동의 박수가 길게 물결쳤다. 곧 이어 한 여성이 단에 올라왔다.

“저는 대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사는 이혼모입니다. 철저한 아이리시계 가톨릭 부모 밑에서 자란 저는 아들을 엄하게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점점 비뚤어져서 틴에이저때부터 오클랜드 우범지대의 불량배들과 어울렸습니다. 저는 그로 인해 극심한 불면과 목 디스크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저와 아들은 불행한 삶을 서로를 탓하며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렴풋이 옛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도구로 키워달라던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들이 발을 못 빼고 있는 우범지대로 찾아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우가정들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 후 그녀는 십년 째, 성탄절 때마다 오클랜드의 불우가정을 위한 선물전하기 운동을 벌여온 것이다. 편모 가정 20여 곳의 어린이들의 선물 목록을 받고, 모금운동을 벌이고, 목록대로 선물을 구입, 예쁘게 포장해 전하는 데 12월 한달을 바친다는 것이다. 오늘도 도와준 교회에 감사인사차 왔다고 했다.

“물론 지금 이일을 제일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 제 아들입니다. 우리 둘 다 행복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까?”


<김희봉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