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하순에 보스턴에 다녀왔다. 세 아이가 전부 동부에 살다보니 온 가족이 모이려면 우리 내외가 큰딸과 아들이 사는 보스턴으로 가고 뉴욕에 사는 막내딸을 그 곳으로 오도록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불문율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었지만 그 목적은 달랐다. 세 아이들을 만나기보다는 새 가족을 보려는 것이 주된 방문 목적이었다. 큰딸의 아들, 즉 외손자를 만나러 간 것이다.
막내딸이 1971년 초에 태어났으니 우리 가족에 실로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처음으로 새로운 식구가 생겨난 셈이다. 물론 큰딸의 결혼으로 맞은 사위도 새 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새로운 후손의 출생은 외손자가 처음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학업 마치고 결혼하면 손자들이 쑥쑥 생겨날 것으로 믿었던 우리에게 새 가족 얻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늦어도 35세까지는 결혼을 하겠다던 큰딸은 약속기한을 눈앞에 두고 미국인 사위를 보스턴에서 데려와 한국식 큰절까지 시키면서 결혼 허락을 받았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딸 부부는 자녀를 얻으려고 여러 방법으로 노력했고 시험관 아이도 시도했으나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한국에서 입양을 해오기 위해 서두르더니 마침내 지난 7월 남자아이가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입양절차도 매우 까다로워서 양부모의 자격심사는 절반이 통과치 못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연령도 45세까지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아이의 미국 이름은 딸 부부가 짓고 한국 이름은 할아버지인 나에게 부탁하여 ‘원일’(元一)이라고 작명해 주었다. ‘원일’의 돌은 7월이었으나 미국에 오자마자 낯도 설고 여러 가지 환경이 뒤바뀐 상태에서 첫 번째 생일상을 차려주기가 마땅치 않아 3개월의 적응기를 보내고 지난 10월24일 한국식으로 돌상을 꾸미고 돌잡이 행사도 가졌다. 사위와 안사돈은 처음 보는 돌잡이에 이것저것 물으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딸 부부는 연령제한에 걸리기 전에 한 명을 더 입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원일’이가 유치원 학생쯤 되면 입양 사실을 말해 주고 성장하면 생부모를 만날 기회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한국은 족보를 중요시하는 사회이고 족보는 혈통을 가지고 따지지만 입양을 통해 대를 잇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혼을 보더라도 생판 모르던 남녀가 만나 자녀를 낳아 또 다른 가족을 이루는 것처럼 한 가족이라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자신이 낳은 자식만이 진짜 핏줄이라는 사고는 종족보존의 본능 이외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남이 낳은 아이도 내가 기르면 나의 자식이 되고 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사람들이 손자손녀를 돌보며 힘들어 하면서도 왜 그렇게 귀여워하고 자랑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아내는 매일 같이 컴퓨터에 저장된 ‘원일 파일’에서 외손자를 보는 것이 즐거움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과신(?)하는 큰딸 못지않게 팔불출이 되어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원일’은 누가 뭐라던 나의 큰 외손자이고 나의 소중한 가족이며 우리 가족의 금지옥엽인 것이다.
조만연 / 수필가·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