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가진 나 때문에 늘 근심걱정을 하시던 엄마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듯 청개구리처럼 난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이나 하라고 강요하는 모든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지나쳐 가게 했다.
쉽게 넘어지지도 않고 친구들하고도 잘 어울리고 스스로 학교 일도 잘 해내고 동네에서 개구쟁이로 나름 잘 알려져 있고(?) 그런 나는 엄마가 하시는 걱정의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해 궁금하지 조차 않았다. 그러던 내가 장애자녀를 가진 부모님의 마음이 자녀가 스스로의 장애에 대한 생각과는 무척 다를 뿐만 아니라 훨씬도 깊고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또 나이에 따라 필요한 대처기능이 달라지기 때문에 장애자녀의 부모는 이래야한다는 한 가지 처방은 없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녀가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데 그와는 대조적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장애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이야기를 하면 내 아이는 전혀 장애가 없고 그냥 좀 늦된다는 것이 그분들의 공통적인 말이다. 자녀의 언어발달이 좀 뒤지거나 사회성이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로 자폐가 아니냐고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이지 내 자녀는 장애가 없다는 말이 일리가 있고 맞는 말일 수 있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 4살 때까지 말을 못했고 7살까지도 글을 읽지 못했다는 것도 그렇고, 불후의 작곡가인 베토벤은 음악교사로부터 작곡능력이 빵점이란 소리를 들은 것은 학생의 잠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교사의 무능력을 탓해야 할 것이다.
세계아동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월트 디즈니만 해도 기자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쫓겨 난 것도 내 자녀가 장애가 없다고 강조하는 부모님의 편을 드는 내용이다.
사랑스런 자녀가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는 것은 부모에게는 죽음과 같은 아픔이다.
첫 단계는 바로 쇼크로 주변의 말이 들리지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부정하는 단계가 지나면 나에게 일어난 가혹한 일에 대해 절대자나 배우자에게 역정을 내는 단계라고 한다. 화를 내도 부정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무모하게 이런 저런 좋다는 일을 다 해보며 쫓아 다니는 단계를 협상의 단계라고 한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을 때 사람은 지치게 되고 심하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 우울증의 바닥에서 서서히 일어나 실질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찾아 중요한 정보에 귀를 기우리며 적응해 가는 단계가 시험단계이며 그런 것이 다 지나고 나면 장애를 받아드리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면 이전 단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이론이 아니고 바로 돌고 도는 사이클 이론이다. 수용을 하고 나서도 때에 따라 화가 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뭐가 좋다고 하는 꼬임에 시도 때도 없이 넘어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장애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부모님께 장애가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 상태에서 일반 또래아이들보다 뒤지는 부분이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국 공교육에서는 초등학교부터는 장애라고 판별이 난 학생들에게 특수교육의 혜택을 주지만 0세에서 5세 사이의 아동들에게는 장애판별이 없이도 서비스가 필요하면 주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장애유무가 중요한 것보다는 현재 연령에 맞는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리저널 센터나 학교를 통해 여러 가지 교육이나 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사교육비를 내어 언어치료나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나 미국에서는 사교육비를 들이지 않고도 교육을 해주기 때문에 그냥 또래아이보다 다른 내 아이의 치료와 교육을 의뢰하는 것이 좋다.
김효선
<칼스테이트 LA특수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