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20세 꽃나이로 남편을 처음 만난 지 50년이 되는 가을이다. 50년 세월이라면 한 세기의 반인데, 하루 낮 춘몽처럼 어느새 그 긴 세월이 새어갔을까?
지난 봄, 남편의 희수(喜壽) 생일날 조촐하게 파티를 가졌다. 30여년 같이 희로애락을 나눠온 동료들과 그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모두 흰머리가 더 많은 노신사들과 노마님들이다. 삶의 기미가 낀 지나온 시간을 회고하면서 황혼의 아름다움을 다듬고 있는 친구들에게서 살아온 역사가 읽혀진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원조인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 문학의 주제는 <시간>과 <무한>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시간이라는 의미가 존재하며, 내가 시간과 함께 가기에 시간이 곧 우리 자신이라는 그의 논리는 유한의 시간을 가진 인간에게 생각을 하게 한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며 시간은 나를 휩쓰는 강이지만 내가 곧 강이다. 시간이 우리 밖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서 흐르고, 시간은 곧 우리 자신이다. 시간이 무서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이 숙명적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새로운 시간론’에서 말한다.
그의 사상은 허만 헤세의 <싯달다>를 연상시킨다. 싯달다가 산 속에서 구도해도 찾지 못한 생의 진리를 찾기 위해 강을 건너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세속적 인생을 거치고, 마침내 늙어서 강가에 돌아와 드디어 흐르는 물의 상징을 통해 합일을 이루어 해탈하는 것과 사상 면에서 유사하게 생각된다. 보르헤스도 헤세처럼 불교사상에 심취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생은 그 유한성 때문에 더 가치 있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으면 정지할 때가 있음이 자명한데, 시간의 시작과 매듭을 병행하는 지혜로 살아간다면 마음으로 시간을 다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심리학자 윌리엄 마스턴은 3,000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 라고 물었다. 응답자의 94%는 “미래를 기다리면서 현재를 그저 참아내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척박한 현재로부터의 탈출구로 부재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일까?
시간이란 실체를 생각해본다. 결국 현재의 시간만이 온전히 존재하는 복합적 시간이며, 완성으로 향하는 도정이며, 그래서 현재를 충분히 살면서 무위자연대로 받아들일 때 미래의 생은 더 풍성하게 꿈을 이루는 길이 될 것이다. 남편의 희수를 생각한다.
“푸른 가을 날/ 처음 만나던 날/ 눈빛으로 말하는 소리/ 가슴으로 들었네// 멀리 바라보는 눈 속에/ 일렁이는 생의 무늬가/ 빛과 영감으로/ 꿈과 의지로/ 가없는 마음에 문신되어/ 어언 50년 / 디아스포라의 텃밭에서/ 시간은 과거로/ 현재는 미래로/ 우주 속의 물방울로/ 이국의 나그네로/ 과녁을 향한 꿈으로/ 지성과 사랑으로/ 같이 걷는 공간의 길/ 같이 걷는 시간의 길/ 생의 의미를 호흡하며/ 가치를 공유하며/ 푸른 하늘 멀리/ 빛으로 밝히는/ 안온한 지성이여/ 푸른 가을날/ 눈빛으로 말하는 소리 / 내 가슴에 있네”<’그이의 희수생신에’ 전문>
김인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