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들 눈치 보기

2010-08-2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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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큰 녀석 눈치를 많이 본다. 혹시 집 나가겠다고 할까봐서이다. 올해 보스턴에서 대학을 졸업한 큰 애가 여기 워싱턴 지역에서 직장을 구했다. 일단 몇 년 직장 경험을 쌓은 후에 비즈니스 스쿨에 가겠다는 것이다. 집과 가까운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이 필자에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미국이란 데가 워낙 큰 나라여서 타 지역에서 취직하여 떨어져 살게 되면 자주 보기 어려워질 것이고 한번 떨어져 살게 되면 그게 편해 다시 같이 살기 힘들다는 말을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큰 애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 때문이었고 또 방학 때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기에 그다지 헤어져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니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이젠 영영 집을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도움에 더 이상 크게 의존치 않아도 되는 상황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관계의 재정립에 일말의 불안감이 불현듯 찾아왔다.

물론 필자는 그러한 두려움을 다스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직장을 구할까봐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바로 이곳 워싱턴 지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니 기쁠 수밖에.

그런데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몇 달 동안 렌트 예치금이 모아지면 가까운 곳에 아파트라도 얻어 나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큰 애는 오히려 굳이 따로 아파트에 살면서 돈을 낭비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차도 고등학교부터 타고 다녔던 13년 이상 된 낡은 차를 그대로 몰겠다는 것이었다. 뜻밖이었다.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극히 실용적인 사고라고 받아 들여야 할지는 몰라도, 우리 부부에게는 그 이상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후 큰 애가 일 시작한지 한 달 정도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옛 친구들도 보고 이곳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학교 친구들도 부지런히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필자에게는 큰 애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혹시나 그 결심을 바꾸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신 신경 쓰지 말라는 큰 애의 말을 무시해가면서 빨래를 해 바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밥도 챙겨 놓는다. 밤에 아주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는 엄두를 못 낸다. 주말에 늦게 일어나도 싫은 내색을 보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쉬는 날에 몇 시간씩 어린애처럼 비디오 게임을 해도 그냥 못 본체 한다. 어디 불편한 게 있는지 표정도 몰래 살핀다. 소위 심기경호(?)까지 하는 것이다.

상전을 모시고 사는 것 같다. 방 값, 밥 값, 한 푼 안 받으며 오히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가 받들어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 용돈 한 푼 얻어 쓰는 것도 아닌데 절절맨다. 이런 나의 절실한 마음가짐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요즈음 나는 이렇게 큰 녀석 눈치를 보며 산다. 혹시 집 나가겠다고 할까 보아서이다.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다.


문일룡/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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