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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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과 나눔의 철학

2010-07-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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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시골 고향마을엔 감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돌담 주변으로 감나무를 심어 옆집과 경계를 이루기도 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의 길목엔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서 너개 남은 감이 발그랗게 익어 있었다. 농익은 붉은 속살이 훤히 비치는 듯해 지금도 한폭의 산수화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동네 어른들은 그러나 이 감을 절대 따먹지 못하게 했다. 홍시에 군침이 돈 아이들이 한밤중 몰래 긴 장대를 갖고와 따려 했지만 워낙 높이 달려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늙은 먹감나무 끝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이 감을 ‘까치밥’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까치만 와서 쪼아 먹은 게 아니었다. 뱁새도, 참새도 와서 한입씩 쪼아 먹었다. 춥고 배고픈 계절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은 새들에겐 구원의 방주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날짐승들까지 배려하는 ‘까치밥’ 풍습. 생각해 보면 ‘나눔의 정신’은 우리의 유전자에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다.

감 서너 개를 꼭 남기는 넉넉한 마음. 그야말로 겨울 화로같이 따뜻한 이웃사랑이다. 이웃을 생각하고 하찮은 짐승까지도 챙기는 고운 마음씨가 홍시가 되어 달려 있었던 것이다. 까치밥뿐만이 아니었다. 예전엔 가을추수가 끝나면 이삭줍기를 대충하고 일부는 그냥 놔뒀다.

얼마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를 다녀왔다. 동문회와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 세미나가 그곳에서 열려 모처럼 짬을 냈다. 유럽에서는 그래도 가장 잘 산다는 나라이지만 먹거리가 부족하고 비싸 미국과는 댈 게 아니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이번 여행에서 새삼 깨닫게 됐다.

귀국길엔 그러나 ‘까치밥’을 제법 수확했다. 좋은 일에 보태 쓰라며 성금을 내놓는 동문들과 지인들이 적지 않았다. 저마다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었지만 나눔의 마음씨만은 풍족해 보여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

귀국해 보니 ‘까치밥’은 이곳에도 있었다. 소망소사이어티에 도서실을 만든다는 기사를 읽고는 100여 권의 장서를 보내준 분이 있고, 도서기증을 약속한 분도 셋이나 됐다. 도서 구입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성금을 보내주신 독지가도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한 여성단체가 아프리카에 ‘소망우물’을 파겠다고 성금을 주어 현재 우물 60개를 파기에 충분한 성금이 모아졌다. 우리 모두 넉넉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것 같아 괜스레 내 마음도 부자가 된 느낌이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같은 세계적인 부자들이 미국의 억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전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우리의 ‘까치밥’도 그 못지않다.

‘노블리제 오블리주’의 사회적ㆍ도덕적 책무는 물론 아름답다. 돈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벌기 위해 탐욕의 늪에 빠져있는 요즘 세상에 게이츠와 같은 부자들이 나눔의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신선하다. 특히 버핏은 가진 재산의 99%를 내놓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살림에 이웃을 위해 가진 돈을 나눈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실천에 옮기기 어렵다. 부자들의 나눔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한인사회에도 ‘아름다운 동행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불경기로 너나 할 것 없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요즘, ‘까치밥’의 나눔과 배려가 있어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해준다.


유분자 /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boonjay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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